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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8강
 작성자 : 평화한국
Date : 2012-11-13 11:18  |  Hit : 189  
   제10기_평리아_2012_한국성서대학_-_8강_강의안.hwp (84.5K) [3] DATE : 2013-06-04 11:20:01

제10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8강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본 통일리더십

- 그의 역사, 종교, 민중관을 중심으로 -

문대골 목사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 뜻으로, 얼로, 참으로 온 사람

함석헌은 1902년 3월 13일 평북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아버지 함형택 어머님 김형도님의 장남으로 세상에 왔다. 그의 부모가 그를 잉태할 때 무슨 현몽이 있었다든지 하는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으나 함석헌자신의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옛날 중국의 장횡거는 네살 때에 이미 내안의 일이 곧 우주인의 일이요, 우주안의 일이 내 일이다.’ 했다하며, 슈바이쳐도 네살에 밤에 어머니가 자신을 자리에 눕혀놓고 기도해 주고 가는데 왜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를 해주고 나무나 새를 위해서는 아니해줄까, 그것이 이상하여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나간 후 다시 일어나 앉아 자기가 했다는 것이며, 파브르도 네살 때에 햇빛을 무엇으로 알게 되나 그것이 의심이 나서 귀를 막아보고 입다물어보고 눈을 가려 보다가, 눈을 가릴 때야 해가 아니 뵈는 것을 보고 햇빛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내가 본 것으로도 여섯살되는 아이가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 동경에 있을 때인데(1923.2~1928.3), 여관 주인의 아들이 그리 영특해 보이지도 않는데 하루는 느닷없이 그 어머니보고 ‘엄마, 사람이란 왜 사는 거야?’ 해서 듣던 사람들이 놀랐다.

함석헌이 네살때에

함석헌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필자가 함석헌의 유년, 처소년시절을 좀 길게 이갸기하려한다. 이유는 그의 유년 청소년시절의 스토리에서 이미 성격으로 존재한 그의 특성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의 제가가 아닌 날 때부터 독창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무엇을 골돌히 생각하거나 엉큼한 생각을 하는 바탕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타고나기도 그런데다가 내 자라난 환경이 너무 순조로웠던 탓으로 더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무식은 하나 건실한 상식의 사람들이여서 부지런히 일 하였으므로 가난은 하나 언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한 것 없었고, 아버지 어머니도 양심적인 분이어서 우리집식구는 언제뉘게 염치에 어그러지는 행동을 하여 남의 부끄러움을 사거나 말썽거리가 되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우리집은 안으로는 화목하고 밖으로는 남의 신용과 신임을 받는 한개 건실한 평민의 가정이었다. 그 집에 나는 맏아들로 났으므로 귀염을 받아 잔잔한 바다를 달리듯이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서는 우리집을<새집>이라 불렀고 나를 그지방에서 부르는 풍속대로 애놈이라 애명을 불렀는데, 그 <새집애놈>은 말 잘 듣고 싸움한번 아니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아무 깊은 생각, 더구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하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게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어린 때의 기억으로는 너댓살되던 때에 밤에 할머니 품에 안겨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잠이 아니오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깜깜한 가운데 천장에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꽃도 같고, 불길도 같고, 물결도 같고, 무슨 짐승도 같고, 수 많은 눈도 같고, 가지가지의 형상이 번차례로 나타난다. 굉장히 넓은 세계가 있고 그것이 일사에 흘러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새 세계가 나오기도 하고, 그 모양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데 거기는 반듯이 무서움도 아닌 일종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붙어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정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자다가 이따금 공연히 깨어 말할 수 없는 짜증이 나던 일이다. 까닭모를 짜증이다. 무엇이 분한듯도하고, 슬픈듯도하고, 안타까운듯도하고, 내 살을 스스로 꼬집고도 싶었다. 그래 자연 손발을 비꼬며 울었다. 울음을 내는 것도 아니고 비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물론 어른들은 왜 그러느냐 책망하며 누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에도 그 몰라주던 맘은 답답하였다. 어디서 오는 것임을 그때는 물론,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막연한 생각에 그때 무엇이 크게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그 맘을 좀 더 알아서 풀어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내 혼은 혹시 좀 더 크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어린애들이 까닭을 알 수 없이 우는 것을 보면 나 자신 같은 생각이 있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한 위대한 혼의 아구가 트려고 그러는지 모른다. 무슨 악마적인 것과 씨름을 하느라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1964 죽을 때까지 이걸음으로 p140-142)

함석헌은 한국을 통한 새 세계를 이루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준비해둔 인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미 함석헌이 너댓살되던 해 컴컴한 잠자리에서 손발을 비비꼬며 몸부림을 했다는것, 그 흑암속에서 굉장히 넓은 세계가 있고 새 세계가 나오기도 하는 것을 보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들은 함석헌을 그냥 지나 칠 수 없게 한다.

함석헌에게는 그의 유년시절, 청소년시절의 정말 아름답고 감격스럽고 품격높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함석헌의 이 같은 이야기들은 함석헌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석헌을 일러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 혹은 동양철학의 대가로 알려진 유영모의 제자라 말하나 함석헌의 함석헌됨은 함석헌의 독창적인데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 사상, 생의 철학의 기본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하여 1901~1919년까지의 청소년기에 있었던 함석헌의 히스토리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야기하나. “얘, 그건 사람아니냐?”

함석헌내 밭에 참외가 몇 그루 있었다. 먹음직한 참외가 달려있어 좀 더 두었다가 잘 익으면 따먹어야지 하고 아꼈다. 그런데 누이동생 석보가 어느 날 먼저 떠먹어버렸다. 이젠 잘 익었겠지 하고 참외덩굴속의 참외를 찾아봐도 없었다. 석헌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누이동생을 다그쳤다. 함석헌이 전하는 말로는 자기네 7남매가 다 똑똑하고 내로라하는데, 그 누이만 좀 부족한데가 있어 어머니가 평소에 좀 아쉬워했다. 해서 조금은 맘을 놓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밖에를 나가셨다가 들오시는 어머니가 딸을 닥달하고 있는 아들 석헌에게 무슨 일로 이 야단이냐며 이유를 물으셨다. “저게 내가 익으면 따먹을려고 보아두었던 참외를 떠먹어 버렸다.”고 씩씩거리며 대답하자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조용한 음성으로, “그건 사람아니냐. 입이야 한가지지.”하시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장남인터에 생긴 것도 잘생겨 “제가 감히 내것을”했던 것인데 어머니의 의외의 대답에 천둥을 맞은 것 같았다. 함석헌은 이때부터 삶의 문제를 씨름하기 시작한다. 함석헌은 후에 그때“그말은 내가슴에 칼처럼 찔렀다.”라고 했다. 함석헌의 나이 그때 여덟이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사람을 통해하시는 하나님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아이였다.

열한살때들은 아버지의 엿장수 엿 빼았아 먹었다는 이야기

“어렸을 때 당신(아버지) 이야기를 한 것 중에 내게 인상깊게 남은 것은 서당에온 엿장수의 엿을 아이들이 빼앗아먹은 이야기다. 하루는 그 바닷가 촌구석에 엿장수 할아버지가 왔다. 서당아이들 중에 대가리 큰놈들이 마침 훈장이 나간 짬이라 그 엿을 빼앗아 먹기로 했다. 한놈이 가서 ‘엿 삽시다.’ 미처 거기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놈이 ‘엿삽시다.’ 세놈네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엿삽시다.’ ‘엿삽시다.’ 할아버지는 하는 수없이 어깨를 벌려 엿고리에 엎디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엿은 어느 놈이 가져갔는지 알 수 없이 다 가져가고 고리는 텅 비었다. 엿을 빼앗아 낸 큰놈들은 이따가는 책임을 져야할 것을 알므로 작은 아이들을 온통 다 모아놓고 한 조각씩 나누어주고는 먹으라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받기는 받았다. 아니 받으면 큰놈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아니 받을 수 없지. 그러나 그는(아버지) 먹을 수 없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져다주는 엿을 먹지 못하는 겁장이가 있다. 아버지는 엿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생각하니 집에 가도 걱정을 들을 것 같아 엿은 손에 쥔채 옆의 수수밭에 들어갔다. 먹지는 않았지만 서당애들이 엿장수할아버지의 엿을 빼앗아 먹었다는 것은 들어 내놓은 사실이니 자기만 아니하였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는 동안 해는 지고 엿은 손에서 녹고. 집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남의 아이들은 다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아이가 아니온다고 그 수수밭 고랑 앞을 몇번을 오가며 ‘야, 형택아, 형택아!’ 부른다. 나가야 할 줄은 알면서도 나가지 못하고, 그때의 생각이 지금도 아니 잊힌다.”고 하면서 마흔 더 넘은 때에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같은 그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음과같은 소회를 덧붙인다. “그 엿이 그 다음 어찌되었는지, 그 수수밭고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나와서 뭐라고 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이야기를 들은 나도 오늘까지 잊지 못하고 ‘내손에 혹시 그 엿이 있기나 한 듯’들여다본다.”

아홉살때 스스로 한 삭발

머리를 잘랐다. 아홉살이 될때까지 집안어른들의 말은 별로 거슬러본 일이 없고, 작고 크고 간에 물어 보지않고 한 일이 별로 없는 내가 그것만은 웬일인지 하루 학교에서 하잔대로 내뜻대로 머리를 빡빡깍고 갔다. 아무래도 그것만은 해야 옳은 것 같고, 맘대로 하고 가도 알아주실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한날 같이 깎은 동무의 아버지가 아들죽인다고 학교에 와서 자식 내놓으라며 식칼로 마루를 쳐서 그 칼자리가 몇해가 지나도록 아니없어질 만큼 되는 것을 보고도 나는 맘이 든든했다. 과연 집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다만 할머니가 ‘아이 그 좋은 머리를!’하고 좀 아까와 하였다.”

열살때의 글짓기, ‘사람이 하는 일없이 썩어서는 못쓴다.’

함석헌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함일형이라는 이었다. 집안의 숙이 되는 이었는데, 함석헌이 “내가 세상에 나와서 사람으로 처음본이는 이 이다.”하고 말하는 이다. “아버지는 내아버지요, 집은 물론 우리집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말한다면 나는 어린생각에도 그를 먼저 쳐야 할 것을 알았다. 일찍 동경유학을 한 한학자이기도 했는데, 웬지 그는 벼슬을 못하고 말았다. 과거도 그가 가르쳐줄 사람은 많이 하기도 했는데 그는 못했다. 무슨 사건이었는지 어릴 때 일이어서 알 수가 없으나, 하여간 무슨 억울한 일이 있어 민중의 앞장을 서서 일어다가 관가에 잡혀가서 볼기를 맞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린맘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그가 어떻게 벌거벗기고 볼기를 맞았을까,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던 생각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그 함일형아저씨가 하루는 함석헌네집을 찾아와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함석헌은 그의 유일한 선생님께 ‘사람이 하는 일 없이 썩어서는 못쓴다.’ 하는 글을 써 드리게 된다. 함석헌의 나이 열살때였다.

열한살나던 해, 시례를 엎고 5리를 걷다.

함석헌이 다니던 서당 삼천제가 덕일소학교가 되었다. 덕일소학교를 세운이는 함석헌이 하늘아래 첫사람이라며 존경해마지않던 그 함일형이었다. 어느 날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선생을 전송하기위해 아침 일찍 어른들과 함께 한 오리쯤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것이다. 한 아이가 먹지 못하고 선생전송에 나섯다가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데 그냥 주저앉아 못가겠다는 것이 였다. 동행하던 사람들은 다들 가버렸고 석헌이만 남았다. 석헌이보다는 서너살쯤 나이 어린애였는데, 석헌이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석헌은 이를 악물고 학순의 아들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쉬고 또 쉬며 오리를 돌아 걸어 학순네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성경말씀대로 실천한것이었다. 학순네 마누라는 가난하고 게으른데다 욕 잘하고 쌈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이였는데, 며칠 후 뜻밖에도 새우 한바가지를 들고서 석헌네집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함석헌의 어머니께 고마운 마음과 칭찬을 아끼지 않고 갔다. (이치석, 함석헌평전. 시대의 창 p79. 2005.11.1)

열한살 함석헌, 텅 빈 방에 홀로 남다.

전근하신 선생님후임으로 새 선생님이 오신다.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자 아이들은 마중을 한다면서 모두 달려 나갔다. 그런데 함석헌은 텅 빈 방에 홀로 남았다. 누군가 선생님이 드실 방을 치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성생님 얼굴이야 나중에 본다고 해서 손해날 것도 없었다. 함석헌은 지저분한 방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웬지 좋았다. 이일이야 말로 꼭 자신의 일로 느껴졌다. 그것은 누구를 돕는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함석헌은 그렇게 새로 오시는 선생님 방을 깨끗이 청소해놓고는 말없이 제집으로 돌아갔다. (이치석, 함석헌평전. 시대의 창 p79. 2005.11.1)

열두살 함석헌, 일심단 단원이되다.

“덕일학교에 다니는데 나보다 서너살 위되는 이용엽이 라는 사람이있었다. 몸은 결핵병으로 생겼고 성질은 온순햇다. 여성적인 면이 있고 재주있고 맘 착한이었다. 그런데 그 이용엽이 덕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양시에 새로 선 중학교에 가더니 한번은 방학에 돌아와서 나더러 좀 의논할 일이 있으니 오라는 것이다. 오라는 곳으로 갔더니 장이순, 장자일, 장창규를 합해 모두 다섯이 모이게 됐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용엽이 아주 엄숙한 태도로 말을 끄집어내는데, ‘우리는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서로 맹세를 하고 동지가 되자는 것이었다. 당시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애국을 약속하는 단지동맹들이 있었다. 함석헌은 어떻게 손가락을 찍을 것인가 걱정을 했는데, 피로는 말고 잉크로 쓰기로하여 글은 용엽이가 지어 다섯장을 쓰고, 손도장을 찍어 서로 한장씩 가지가로 하고,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서로 비밀을 지키다가 일단 일이 있을 때는 나선다는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그 단체 이름을 ‘일심단’으로 했다.” (전집4.p 104)

열넷때. ‘인격’, ‘인간’에 눈뜨는 함석헌

나는 일생에 종이라는 것을 눈으로 본 일이 없다. 그것만은 참 하나님의 은혜다.

열넷, 열다섯이 되어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공부를 하느라고 보따리를 걸머지고 그 장씨네, 김씨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 근처를 지나노라면 그들과 우리와는 떤 세상에 사는 것 같았고, 그래도 그 기와집 옆에 무너져가는 오막살이에 살며 머리가 희게 센 사람들이 새파란 ‘안댁’, ‘나리님’들한테 이랬나, 저랬나, 하는 반말질을 수굿수굿 듣는 것을 볼 때 가엾이 보였다.

문벌로는 보잘것이 없었던 용천이였지만 그래도 그중에도 제노라하는 계급이있었다. 김시, 이씨, 장씨하는 여덟성이 있어서 소위 용천 8대성이라 했다. 다행이도 감탕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나는 일생에 종이란 것을 눈으로 본적이 없었다. 그것만은 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어릴적 듣기에 그 장씨네에는 종이 있었단 말을 듣고 종이란 뭐냐? 묻던 일이 지금도 선하다.“ (‘물아래서 올라와서’ 전집4 p87)

열네살 함석헌, “나만 중학교엘 가게 돼 무슨 죄나 지은 듯 미안해..”

“ ‘얘, 온 장터에 두루 다녀도 쌀 사자는 놈은 있어도 글 사자는 놈은 없더라.’ 이것은 내가 여남은 살 때 사점서 소학교를 졸업하려 할 때 들은 소리인데 오늘까지 못 잊는다. 그것은 나와 한반에 다니던 동무의 아버지가 저도 중학교에 간다고 조르는 아들을 억누르느라고 한 소리였다. 그 아버지는 농사를 하는 사람이요, 구두쇠였다. 아버지의 그 말에 그만 눌려 말도 못하고 시무룩해 버리는 동무를 보고 중학교에 가기로 되어있던 나는 무슨 죄나 지은 듯 미안해 무슨 말을 해줘야 할듯하면서도 하지 못했던 때의 그 슬픈 기분이 지금도 생각하면 끓는 솥뚜껑만 열면 훅하고 김이 치달아 오르듯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그는 그 다음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했다. 학교에서 방학에 돌아오면 그 얼굴과 손이 점점 시커먼 농사꾼이 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을 좀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못했고, 천연히 서로 이야기는 하면서도 혹 뽐낸다 할 듯해서 두렵던 생각, 될 수록 공부나 내가 가있는 도회지의 이야기는 피하려 했던 생각이 지금도 같이 있다.”

함석헌의 평양고보 3년회고 “... 그 정신은 다 잠자버리고..”

함석헌은 1916년 평양고보에 입학. 1919년 3월에 자퇴하게 되는데, 이 평양고보시절의 자신을 가혹하리만큼 비판하고 있다. “나는 자라나기를 민족주의 가정에 났고, 처음부터 교육받기를 강한 민족주의 기독교에서 받았건만 공립보통학교 두 해를 거쳐 고등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그만 그 정신은 다 잠자버리고 그저 속된 입신출세 주의의 생각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또 거기다 군중심리도 있어서 삼일운동전까지의 학생계를 보면 어느덧 관립, 사립의 대립의 경향이 있었다. 관립학교 학생은 사립학교 학생을 실력없는 것으로 깔보고 사립학교 학생은 공립학교 학생을 정신없는 것들로 없신여기고. 만일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온통 일본이 다 되고 말았을 런지 모른다. 관립학교 학생의 심리는 친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현상에서 별수 없지 않느냐? 쓸데없이 공상만 말고 학문길로나 나가는 것이 좋다.’하는 것이었고, 사리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실력에 부쳐 관립에 못 들어 왔으니 정신적으로 반항이라고 해 보지만 저희도 들어 올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들어오고 싶은 것이요, 또 들어오면 그것도 관립심리가 될 것만은 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갔다면 우리는 다 일본사람의 심부름꾼밖에는 될 것이 없었다.” (전집4. p126 "독립만세“)

열아홉살 함석헌, 평양고보를 자퇴하다.

함석헌은 평양고보 삼학년말에 학교를 자퇴한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입학생의 경우 4학년 졸업을 하게 되는데, 함석헌은 4학년 졸업반 진학을 앞두고 퇴학을 당하게 된다. ‘평고의 3.1운동 주모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함석헌이 관립평고에 가게된 것은 당시 한의사였던 아버지 함형택의 강권때문이었다. 아버지 함형택은 ‘큰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사를 만들어야한다.’는 신앙에 가까운 소원을 품고 있었다. 해서 함석헌은 평양고보를 졸업하는 동시에 경성의전에 진학할 예정이었고, 게다가 당시경성의전은 관립경성고보와 평양고보 졸업생들에겐 무시험특례입학을 보장하고 있는 터였다. 함석헌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집안친척형인 함석은에 의해서였다. 함석은은 함석헌이 ‘하늘아래 첫사람’으로 존경해마지 않던 집안의 숙부되시는 함일형의 두째아들이였다. 함석은은 당시 평양의 숭실중학교의 교사로 3.1운동에서 평남북의 학생계를 맡은 지도자격의 인물이였다. 3.1일 전날밤 평양시내의 학생대표들이 숭실학교 지하실에 모여들었고, 내일 있을 행사계획내용과 독립선언서, 태극기들을 불타는 가슴으로 나누어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함석헌의 진로를 터무니없이 바꾸어놓는 3.1만세 행렬에 가담한다. 함석헌은 후에 당시를 이렇게 회생한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서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 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생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을 꽂아가지고 행진해오는 일본군인과 마주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같았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전집4 p128,129)

만세사건이후의 함석헌의 태도는 참인격, 정말 큰 인격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한다. 그의 계속되는 회고를 좀더 주목하자. “만세를 부르고 난 후 친구들은 다 복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서기가 되고, 군수, 경부가 되고, 의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계엄령이 내렸다가 안정된 뒤에 집에서 어른들이 다시 학교 가라하기도 하여 다시 봇짐을 싸가지고 평양에 나왔으나 차마 학교문엘 들어 설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이밀기가 우선 싫고 한번막차고 나온 학교에 다시 들어 설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다시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다니기는 싫었다. 크게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맘이 약해 차마 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딴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의사가 되기는 그만두었다. 관과는 원수가 되었다. 막연하지만 나는 무슨 새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커다란 것을 찾은듯했다.”(전집4 p129-130) 평양고보를 퇴학이 아닌 자퇴를 한 후 자신의 인생은 딴길로 나가기 시작했고, 관과는 원수가 되었다고 했는데 딴길이란 함석헌이 알았거나 몰랐거나 관과는 반대가 되는 길이었다. 이후 함석헌의 일생을 점검해보면 함석헌이 십대에 원수가 되었다는 ‘관’이란 단순한 벼슬만이 아닌 국가권력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가 아닌 국가권력으로부터 민중을 지켜내는 수호신으로서의 평생을 운명짓게 한 것이다.

“나는 무슨 새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커다란 것을 다시 찾은듯했다.” 고 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헤매이기 두해동안 밤중에도 산을 오르고, 바닷가로, 들녁으로 쏘다니는 것을 본 마을여인들은 ‘회원국의원댁 큰아들이 공부하다가 미쳤다더라.’며 숙덕거리곤 했다. 함석헌자신도 , 그러니까 1919년 3월 평양고보에서 제적을 당하고 오년동안을 헤메다가 1921년 3월 정주오산중학에 편입을 하게 되는데 그 어간의 2년을 울면서 산 세월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뜻으로야 그 학교의 제적사건이 어떤 위대한 의미의 것이였다 해도 현실적으론 비참, 비극 바로 그것이었다. 1921년 3월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편입해 갔을 때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투옥되어 아직도 감옥에 있을 때였다. ‘3.1운동으로 투옥되신 교장선생님이 아직도 감옥에 계시다!’ 함석헌은 울컥하는 눈물을 쏟아야 했다. 3.1운동으로 제적을 당하고 2년 동안 사방으로 헤매며 살아온 자신과 교장선생이 일신이듯 느껴졌다. 1922년 7월 이승훈이 석방되어 오산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해, 겨울 어느날, 함석헌은 이승훈의 부름을 받게 된다.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는데 교장이승훈은 함석헌에게 거의 기절한 만큼 놀라운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함군 내가 감옥에서 돌아온 후 여러 선생들을 통해서 함군의 이야기를 잘 들었네. 내년봄 졸업한다는데 함군이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우리 오산학교에 와 주어야겠어. 학비는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댈테니까 걱정말고.” 함석헌은 너무 감격스러워 대답마저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함석헌은 1923년 3월 오산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본으로 갔고, 1924년 다음해 동경고등사범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경고등사범제학중 동교의 선배 김교신을 통해서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게 된다. “오해를 부를만한 말이지만 내게 있어 내 촌의 값은 36년 일본의 종살이를 바꿀만한 것이었다.”는 그의 말이 증언해준다. 함석헌이 내 촌을 말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내 촌에 대한 찬사가 있다. 내 촌의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성서와 애국의 결합이었다. 전통적인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한 함석헌에게 내 촌의 성서해석은 전혀 새소리를 듣는 듯했다. 또 하나 경외스러운 것은 성서의 ‘현재에의 적용’이었다. 성서를 통한 현재의 해석의 심오함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저것이 참기독교다.’하게했다. 내 촌은 기독교사상가로서 두개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Jesus)와 일본(Japan)그래서 Two‘j'라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내 촌의 일본사랑에 대해서는 이미 입장이 달라있었다. 그는 이미 1919년 3.1운동으로 국가의 실체를 체험한바있다. 소위 그 관官이라는 것 말이다. 또 지난해 1923년에는 동경의 대지진을 경험했다. 개인으로서 일본인, 민중일본인은 조선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조종하는 일본인, 민중은 전혀 딴판이었다. 강포하고 사악했다. 함석헌에게는 이때이미 영원한 저항의 대상으로 규정되어있었다. 또 하나 동경고등사범재학중 얻은 축복중하나가 <성서6인동우회>였다.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귀국해서<성서조선>동인지를 발간하기로 합의하고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면서 바로 귀국, 은사 이승훈의 격려를 기억하며 정주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 부임한다. 1928년 3월이었다.

평생의 한자리 오산 10년 (1928-1938)

오산학교 함석헌의 10년 교직생활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자질이 그랬고, 더 나아가 ‘선생’은 그에게 필생의 업같은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10년 내내 두툼한 노트한권이 들려져있었는데 그 노트표지에는 <성서적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고 쓰여 있었다. 후에 정(正)야(野)사를 막론하고 한국역사학계에 불휴의 명저가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제됨>의 밑돌같은 것이었다. 함석헌의 조선역사가 정식으로 공석에 나타나는 것은 1993년12월 31일에서 1934년 1월 3일까지 4일간의 무교회동인들의 겨울철 성서집회에서발표로 <김교신일기1933년 12월 3일자>였지만 실재로 그 것은 함석헌이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특별히 기억해둘만한 함석헌 오산학교 10년에 기억해둘 애피소드들이있다. 항일투쟁에 공산주의계열이 앞장을 서게되면서 약간은 미온적인 민족주의진영의 선생들이 있어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일기시작했고, 드디어 모, 모선생을 손보아 주기로 해 작당한 학생들이 교무실로 처들어갔는데, 학생들이 밀려온다는 정보를 미리얻은 선생들이 한사람도 남음없이 다 도망쳐버렸는데, 함석헌만은 책상에 엎드린 채 학생들로부터의 구타을 다 당해냈다. 학생들은 망연자실했다. 손보아 주려던 선생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평소에 존경하던 선생님을 폭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학생들은 후에 함석헌을 찾아가 깊이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했다. 한 학생이 조용히 함석헌에게 물었다. “선생님, 다른 선생님들 다 도망갔는데 선생님은 외 혼자서 남아계셨습니까? 그리고 그 폭행을 당하시면서 그렇게 엎드려 계셨던것은요?”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 외 도망한단 말이냐? 그리고 내가 옆드려서 맞은 건 날 때리는 놈을 내가 알았다 해봐, 내 맘이 편할리 없지. 난 성인이 아니니까. 그래서 아예 엎드려서 맞았던 거야.” 함석헌의 답에 모든 학생들이 교무실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교육위원회에서 이제부터 일본말로만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지시가 내렸다. 국어책은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로 된 것이었다. 함석헌은 일본어로 된 국어책의 한문을 한글로 풀어 오도록 했다. 학생들은 함석헌의 의도를 알고 은근히 좋아했다. 학교에서 야단이 났다. 모든 과목을 다 일본말로강의를 해야 하는데 학무국의 지시를 거부하는 선생이 하나있다. 함석헌이었다. 일본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부임해온 교사가 있었는데 유창한일어로 국어(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유난히 잘난체를 했다. 상급학년생들에게서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는 여론이일었다. 드디어 사고가 터졌다. 강의를 끝내고 나가려는 선생을 향해 “선생님, 왜 안색이 몹시 언짢아 보이시는데요...” 하고 한 학생이 약간은 놀리는 투로 시비를 건 것이다. 학생의 무례하다싶은 어투에 선생은 대뜸 “뭐야, 이놈아.”했고, 그러고나니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아니 선생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어찌그리 비교육적인 어투를 쓰시는 겁니까?” 선생과 학생들사이에 아주고약한 분위기가 이루어졌고, 드디어 선생은 교실에 주저앉자 엉엉 통곡하게까지 되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교무실로 전해졌고, 소식을 접한 한 교사가 이 교실로 달려왔다. “아무리 문제가 있다더라도 선생에게 이런 태도는 안된다. 누가 이 일을 선도했는가? 나와 선생님에게 용서를 빌어야한다.” 학업이 다끝나고 수시간이 흘렸다. 어둔밤이 깊어져간다. 마을에서는 자식들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야단이 났다. 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반학생들이 벌을 서고 있었단다. 그런대 그 벌을 주도하고 있는 선생이 함석헌생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들이 무슨 단단히 잘못한일이 있는 게야.” 학부형들이 함석헌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확약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함석헌은 서슬푸른 일본의통치하에서도 조선인(자유인)으로써의 그자세가 흔들릴 줄을 몰랐다. 일본어로의 강의도 거부했고, 일본인의 창시개명도 거부했다. 교육청에 정보가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학교경영진들까지도 학교운영에 어쩔 수없는 일이라며 교육정책에 따를 것을 종용했다. 함석헌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그리고 함석헌은 일생을 바치기로 스스로 결심했던 오산을 떠났다. 오산교단에 역사교사로 선지 꼭 10년, 1938년 3월이었다.

오산학교를 사직한 함석헌은 오산을 떠날수는 없었다. 정든 제자들도 제자들이었지만 함석헌은 열정을 바쳐 <말씀모임>을 섬겨온터였다. 이를테면 <열린성서연구모임>이었다. 이모임에서 자라난 제자들중 이기백, 윤창흠, 장기려 같은 이들이 있다. 두해동안 순전한 농사꾼으로 오산에 살던 함석헌에게 새로운 건의가 들어왔다. 평양송산에 송산고등농사학원이 있는데, 그 교장이 뒤늦게 일본동경농대에 유학을 하게 되자, 일본동경에 있는 유학생들이 <오산출신이 주동이 된. 필자주> 열심있는 모금으로 그 학원을 인수하여 함석헌선생을 지도자로 모시고 농촌부흥농민교육을 일으켜 민족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계획이 구체화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석헌은 이년동안의 오산에서의 개인살림에 종지부를 찍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쉽게 함석헌이 송산농사학원의 교장부임을 결정하게 된 것은 ‘함석헌의 꿈’과 상통했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에게는 40에 가까워지면서 아주 간절해지는 평소의 꿈이있었다. ‘농사와 종교와 교육을 하나로 묶는 생활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함석헌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제의가 왔으니 흥분하기까지 했다. 후에 함석헌은 그 동산농사학교의 일을 “소위 내 운동이라 할만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라고 했다(전집4,P272). 그런데 아니었다. 함석헌의 말대로 그에게는 이미 딴길이 준비되있었다. 함석헌이 송산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해가는 것이 1940년 3월이었는데, 바로 그해 9월, 그러니까 함석헌이 교장부임 꼭 6개월 후 계우회사건으로 연행되어 평양경찰서에 수감되고 1년 동안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물론 학교는 반동자들의 소굴이라하여 패교가 된다. 1년 복역 후 출감, 다시 1년후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되어 또1년 옥살이, 1943년 3월, 불기소로 출감하여 농사짓기를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는다.

함석헌이 말하는 인생대학

함석헌을 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함석헌을 우찌무라의 제자, 유영모의 제자라고 쉽게 이야기한다. 함석헌자신이 ‘내 촌은 36년 일본의 종살이와도 바꿀만한 선생’이라했고, 유영모에대해서는 ‘유영모’라는 이름은물론 ‘유’라는 성까지도 쓰지 않고 ‘선생님’이라 칭하였으니 함석헌의 스승들이었다 아니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함석헌을 내촌이나 유영모의 제자라고 표현하는데는 대단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특히 그같은 큰 이유중의 하나는 함석헌의 역사, 종교, 철학하는 모든 것들이<역사의현장>에서 자라온 것이라는 사실에서다. 내촌과 유영모에게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종교가라 사상가라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할 수 없겠지만 함석헌을 그들의 제자라 일컫는 것은 대단한 무과불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민중>이라는 함석헌의 평생의 주제를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할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의 변곡점(變曲點)에서 마다 감옥엘가고 연금을 당한다. 생의 변곡과 감옥은 거의 함께한다. 국가권력기관의 미행이나 연금은 일생동안 그칠 날이 없었고, 일제치하에서, 해방직후 소련군정과 공산당치하에서, 1947.3.17일, 극적으로 월남했지만, 자유당정권, 5.16군사반란세력치하, 전두환정권에서 투옥을 당하고, 출입금지 연금을 당한다. 함석헌의 생각, 사상, 종교, 인격은 이 부단한 수난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감옥을 인생대학이라했다. 놀라운 것은 함석헌은 이 감옥살이를 통해 저항과 종교, 종교와 저항을 함께 익혔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독서의 영역을 극적으로 넓혀 준 것이 감옥이였는데, 이 감옥에서 ‘불경’을 만났고. 노자를 만났다. 바가바트기타, 장자를 거쳐 ‘신란의 교행신증(敎行信證)’을 읽은 것이 인연이 되어 ‘무광수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등을 독파하게 된다. 함석헌이 이 같은 경전을 읽어 가는데 그로 이 경전들의 심층을 읽게 한것은 고맙게도 그가 지금 겪어내고 있는 감옥살이자체였다. 역사와 민중 그리고 종교와 감옥살이 없이 함석헌을 말할 수 없다. 1945년 해방이오면서 풀속에 얼굴을 드리밀던 함석헌이 다시 불려나온다. 그는 인민자치위원회 평북도위의 문교부장이 된다. 소련군정과 공산당지도부에서 함석헌에게 묻는다. 앞으로 학생지도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함석헌의 대답은 명쾌했다. “학생들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게 하겠다.” 그런대 신의주학생사건이 발생했다. 그 학생들 중심 세력이 민족주의계열이었는데, 이들은 소련군정과 공산당지도부에 자주교육을 요구하며, 스트라이크를 일으켰고, 이 학생데모대열은 소련전투기인 야크기의 기총사격까지 가해져 해방100일에 소련군에 의해 23명이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당하고 1000여명 부상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문교부장 함석헌이 그 배후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체포되어 형언할 수 없는 가지가지의 고문을 당하고 투옥 50일만에 석방되었으나 그것은 철저히 계획적인 것이었다. 10개월 후쯤 다시 잡혀간 함석헌은 당시 평북자치위원에 위원장 백영엽을 미행 일주일에 한번씩 보고하라는 특명을 내리면서 30일만에 다시 풀어준다. 고문은 견딜 수 있고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참담함은 차라리 견딜 수 있지만 동료를 미행해서 보고하라는 데는 따를 수가 없었다. 함석헌에게는 함석헌의 신변을 지극히 염려하는 최진삼, 방승방 이라는 두 제자가 있었다. 박승방이 200리가 넘은 박천에서 선생님을 찾아와 월남할 것을 강권했다. 그것은 정말이심전심 같은 것이었다. 1947년 2월 26일, 박승방, 최진삼을 길잡이로 용암포를 떠난 함석헌은 3월 17일 서울에 도착했고, 박승방은 함석헌 무사히 서울에 데려다 놓은 후 바로 북으로 돌아갔다. “승방이는 어찌되었을까?” 함석헌은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했다.

함석헌의 ‘말씀모임’

함석헌은 함석헌만의 것이었다. 철저한자유인이었다. 교회주의의 한국 기독교은 물론이요, 무교회역사 개인집회는 생각도 못할 때 함석헌은 자신이주관하는 말씀모임을 열었다. 1928년 함석헌이 동경교사를 마치고 오산고보에 부임함과 동시에 말씀모임을 열었고, 이 일로 함석헌의 생전의 지원자였던 최태사, 오산교회의 영수 박기

선, 그리고 오산의 설립자이면서 당시 기독교계의 어른으로 독보적인 존재였던 남강 이승훈까지 오산교회에서 출교를 당하게 된다. 국가도, 교회도 함석헌에게는 예외 없이 이방이었다. 함석헌이 박승방을 따라나서면서 내뱉은 말이 있다. 그것은 북한에서 마자막 감옥살이 30일을 살고 나올때 백영엽의 뒷조사를 해서 매주한번씩 보고하라 할 때 품은생각으로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전집4,297)라는 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개인적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아품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들사람인데 함석헌은 글사람(文人, 交士)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그때를 상기하며 말한다. “지식의 죄가 그렇게 큰 줄을 그때까지는 몰랐습니다.”라고. 그가 지닌 지식이 그로하여금 민중으로 살지 못하게, 살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전집4,P272) 함석헌이 월남길에 나서면서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한 그 아주 쉴 곳이란 장소의, 공간의 개념이 아니었다. 지식을 뛰어넘는 삶, 글이 필요없는, 그저 존재가 존재가치요 이유인, 그래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대동세상을 말한 것이다. 이제 함석헌은 동경고사의 1등 졸업생도 아니요, 오산10년의 명교사도, 평북의 문교부장도, 송산농업학교의 교장도 아니다. 맨사람이다. 들사람, 밑사람, 뿌리사람, 그대로 민중이다. 이는 후에 ‘씨알’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태어난다.

함석헌의 또 다른이름, 들사람

함석헌의 또 다른 이름이 들사람이었다. 그가 들사람으로 각인 되어지는 것은 그가 쓴 천하의 명문(?)인 ‘들사람의 얼’이라는 글 때문 이었지만<’에수록’(1961)>민중에게 존경스런 사표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월간 사상계에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면서 부터 일 것이다. 그 두서너해전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글로 사상계의 독자를 배가시킨 일이 있었지만 글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그것은 기독교에 한정된 글이었지만 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천하에 내대는 글이었다. 특히 그 글엔 ‘6.25싸움이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부제가 붙어 이승만정권을 정조준하는 것이었다. “남한은 북한을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 있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꼭두각시밖에 될것이 없지 않는가?(전집14,112) 6.25싸움은 왜있었나?...이 역사의 한길에 앉은 고난의 여왕은 제 욕보고 뺏김당한 것이 어떤 까닭임을 생각하나, 아니하나? 6.25싸움의 직접원인은 38선을 그어 놓은데 있다...이 싸움의근본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그러나 다시금 한번 되새겨 볼때 아무리 싸움은 다른놈이 했다하더라도 우리는 등을 왜거기에 내놓았던가? 왜 남의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당신이 택한것이다... 그렇다면 미운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니며, 일본도 아니요 우리자신이다. 어느 한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칼에 죽는 것이 맘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 한 사람은 없었다...만일 그런 혼이 국민전체는커녕 일부라도 있었다면 소련 중공이 감히 강제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속에 참을 통해 길러진 혼의 힘이 도무지 없음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해방이 우리 손으로 되지 않았으니 해방이 될 리 없다. 이제라도 우리손으로 해방을 해야 한다.”(전집14,117). “국민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말고(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 누구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요,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을 보고하는 말이지...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14.20). 함석헌은 이글로 인해 서울시경정보과에 끌려가 20일 동안의 구류를 살고나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하는 해명서를 쓴다. 함석헌은 먼저의 글에서 분단을 죄악으로 지적한다. 그래서 분단을 회개하라한다. 그 분단의 제일 첫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 있는 것이지만 꼭 같은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지적한다. 종교의 눈으로 한국의 분단현실을 본 것이다. 소위 국민들이 국가권력에 마취되어 사람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오라, 생명이필요하다면 가져가라. 재산이 필요하다면 너희들것으로 해라. 내가 그런 것 들을 너희생명과 바꾸겠느냐? 하는 참의 혼을 받은 인격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통일은 이제 남북모두의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통일은 반공으로, 군사력으로가 아닌 두주의의 대립을 초월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만 가능할 것이다. 공산주의가 자유진영을 이겨도 안되지만, 또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을 이겨서도 안된다.(전집3,190) 두 이념을 넘어서는 자리, 그것은 곧 종교의 차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분명히 말해 ‘중립화통일론’을 제창 했다고 할 것이다. 그는 미·소가 중심이 되는, 혹은 그 양세력중 어느 세력을 업고 이루는 통일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 하더라도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단언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남북이 주체가 되어 이루는 것일 수밖에 없다. “현실 때문에 이미 있는 정권이 어느 시간까지 계속된다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생각은 고쳐야한다. 미·소 두세력의 싸움으로 생긴 이 비극이라면 우리는 통일이 돼도 그 중 어느 하나 따위 식의 정부를 원할 수는 없다. 부활은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생명으로 남이다. 우리는 우리몸을 둘로 가르던 날 도둑놈을 배울 수가 없다. 두려움없이 하는 말로, 오늘 우리의 두 정권은 다 그들(두세력. 필자주)의 제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라내야 할 죽은 살이다.”(전집17, p19) 중립화란 미·소의 힘이 아닌 남북민중이 스스로 깨어 한반도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체오서는 체제를 말한다. 물론 정치학자들, 제도권의 전문가들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될 수 없는 논리라고도 할 것이다. 사실 함석헌의 논리는 지극히 이상적이라는 비난들이 그치지 않았다. 함석헌의 반론역시 간명했다. “그렇다면 전쟁하겠다는 것인데 거기는 처절한 패자만 남게될 것.”이라면서 “그거야 말로 이상론이다.”했다. 그의 이같은 쉴 새없이 겁없는 싸움은 아주 자연스럽게 야권의 큰 그늘이 되어갔다. 재야인사, 야권, 야인, 심지어 5.16군사반란이후 박정희정권의 정보계통에서는 함대통령에 장총리(장준하를 두고. 필자주)라는 별명이 회자되기도 했다. 함석헌이 1960년대 들어서면서 결정적으로 민중의지도자로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박정희를 그 수괴로하는 1961.5.16군사반란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때의 함석헌의 역사관과 종교관은 세계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고 선생의<말씀모임>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교수들, 목사, 신부, 스님들, 젊은 청년 대학생들이 떼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그의 사생활터전은 천안에 자리 잡은<씨알농장>이었다.

1961년5월16일 새벽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소장과 육사8기생이 주도세력으로 장교250여명, 사령3,500여명의 반란군을 몰아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했다. 신문, 방송, 잡지가 모조리 폐간내지는 박정희쿠데타군에 접수되어 쿠데타로의 세상이 펼쳐진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한다는, 친미반공을 핵심으로 하는 소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었다. 정당 및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양원제인 국회도 해산되었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민주정부인 장면정권도 붕괴되는 참상을 당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렸다. 6월하순경 사상계사장 장준하가 함석헌을 찾아간다. “왜 왔는지 알겠소이다. 가만있어서는 안되겠단 소리하러 오신거지?”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무슨말씀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래서 나온 글이 그 경천동지할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이다. 1961년7월호 사상계는 불이 난듯했다. ‘재야의 빛 장준하’의 저자 박경수는 그 글 ‘5.16를 어떻게 볼까?’를 두고 “죽을 려고 환장을 하지 않고는 쓸수 없는 글”이었다고 했다. 함석헌은 그 글에서 5.16을 4.19와 비교하여 논하기를 “4.19는 대낮에 맨주먹으로 으젓이, 떳떳이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 (5.16. 필자주)은 총칼과 군악대로, 탱크로 행진을 했다. 4.19가 잎이라면 5.16은 꽃이라 할수 있다. 5월은 꽃달 아닌가? 군인정신은 '깨끗'이란 한말에 다 된다. 필때는 천지가 눈부시게 피었다가도 수정이 된 다음에는 깨끗이 싹 떨어져야 꽃의 값이 있다. 진 후에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시들시들, 지적지적 붙어있는 꽃은 참 더럽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 한 후는 곧 정권을 민간에게 돌려주고 본래의 자리로 물러간다 선언한 것은 참 군인다운 말이다. 잎은 길이길이 있으므로 그 나무에 바치는 바가 있지만 꽃은 깨끗이 떨어지므로 그 나무를 위해 영원히 공헌하는 것이 있다...평화정신은 늘 부르짖어야하지만 무단정신은 한번만 써야한다.(1961.7사상계 194) 언론기관들은 폐쇄하고, 모든 언론들을 검열하는 군부를 향해 외친다. 믿는 자 만이, 민중을 믿는 자 만이 이길 것이다. 무엇이 믿음이냐? 그의 인격대접, 사람대접 아니냐? 사람됨이 어디 있느냐? 자유지. 자유에만 있다. 자유가 무엇이냐? 정신의 맘대로 사람아니냐? 정신이 어떻게 자라느냐? 말 함으로만, 말 들으므로만 자란다. 제발 이 오천년 아파도 아프단 소리를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고 울어도 못 본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이 되려는 민중을 또 다시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겼거던 지 랄이라도 맘대로 하게해야 할 것이다. 4.19이후 첨으로 조금 열렸던 입을 또 막아? 언론자유주니 남북협상소리 나오더라고 성급한소리마라. 그 원인이 거기 있는 것 아니다. 옆은 수작마라.”(같은 책, P191,192) 함석헌이 이 글을 탈고한 것은 1961년 6월25일 밤이 었는데, ‘5.16을 어떻게 볼까?’는 “써놓고 보면 속과는 딴판 같아 찢어버리고 싶은 넋두리를 하는 동안에 6.25의 밤이 다 새었구나. 3년전 이 밤엔 잠 못자고 한 생각만 했더니.” (1958년8월호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말함. 필자주) “ ‘나라없는 백성이라’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날 참선을 시켰지.(20일간의 투옥을 두고하는 말. 필자주)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하는 말로 끝난다. 글을 쓰면서 “이 글로 또 감옥에 가게 되는 것 아닌가?” 했던 것인데, 글이 발표된 후 소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논란이 일었는데 당시 7명의 최고위원들이 있어 함석헌을 구속시킬 것인가? 문제를 놓고 논란을 거듭하다가 가부를 물었는데 3:3의 표결이 있었다는 것이고, 김종필이 나중에 함석헌구속에 반대의견을 내 무사했다.

함석헌은 1960, 70, 80년대를 살면서 가히 무관의 제왕(?)으로 활동했다. 그 자신은 아무런 조직도, 직위도 없었지만, 그는 5.16자체를 한마디로 거부하는 저항을 살면서도 그의 말씀모임, 동양성서강좌등을 통해 예수, 석가, 장자, 노자의 평화사상을 끊임없이 강론했다. 오산학교, 대광학교등에서 열렸던 군부저항의 강연회에는 10여만 가까운 청중이 모여들었고 “칼뽑아 들고, 정당만들어 정치하려는 박정희는 용서할 수 없다.” 며 포효(泡哮)할 때 그야말로 민중은 열광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마져도 휴지화하고 정당을 만들어 장기집권을 시도했다. 야당과 시민세력이 일체를 이루어 군사정부와 일전을 벌려갈 때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자유언론수호연맹등을 결성, 거의 헌신적이라 할 만큼의 투쟁을 이어갔다. 그런 중에서도 우리가 함석헌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이 그의 구도자적인 정신생활이었다 할 것이다. 그는 하루에 일식을 하는 특이한 사람이었고, 집에 들면 맨 바닥에 앉아, 때로는 열시간이 넘도록 깊은 명상에 드는가하면 어떤 신비한 체험같은 것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그 자신의 이 같은 신비체험을 거부하는 내적싸움을 적지 않게 해내기도 했다. 이유는 신비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그만의 신앙때문에. 필자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함석헌을 말할 때 절대 빼어 놓을 수 없는 그의 씨알사상이다. 이 씨알사상이 공론의 장(長)으로 나아오게 된 것은 1970년 그가 창조하는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이다. 그의 ‘씨알의 소리’는 함석헌이 박정희의 군부정치와 사생을 내건 싸움의 일환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 씨알의 소리를 통한 함석헌의 정말 깊고 큰 이상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모시고’(‘죽을때까지 이걸음으로’P83)라는데 있었다. “쿠데타식의 정변으로...날치

기식의 폭력주의로 정권을 얻으려는 것... 민중을 무엇으로 알고 있나? 민중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민중의적이요...민중을 이용해 불속의 밤알은 어리석은(?) 민중더러 주워 내라하고 먹기는 제가 먹으려는 그런 야비하고 간악한 생각을 가지는 정상(政商)배에도 이젠 민중은 속지 않을 것이다. 말없다고 민중을 없신여기지 말고 ‘민(民)을 주(主)로’모시고 절하고 호소하라.” 함석헌에게 있어 민중은 가르친다거나 이끌어 간다거나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민(民)은 믿음의 대상이었다. 민(民)을 직접 신(神)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아주 분명하게 정책이 아닌 종교라고 단언한다. ‘민주주의는 사실은 종교다’(‘생활철학’1962.전집3권 184).

씨알의 소리는 민을 역사의 주(主)로 섬기는 일을 위해 나타난 것이다. 함석헌은 이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면서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라는 선언과 ‘씨알’의 의미풀이를 내놓는다.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씨알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자신의 힘으로하는 자기교육의 기구입니다.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잡기를 힘씁니다. 씨알의 소리는 어떤 종교,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숭배도 반대합니다.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

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나가려고 힘씁니다.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습니다.” 씨알이라 할 때 보다 더 종교성이요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씨알이란 말은 민(民), people의 뜻인데 우리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입니다. 쓸 때는 반드시 ‘씨알’로 쓰시기 바랍니다. 알은 발음을 알과 같이 하는 수밖에 없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습니다. ‘o’은 극대(極大)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는 극소(極小)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움직임 .필자주)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우리자신을 우선 이렇게 표시해 봅시다. 더 분명하고 깊고 큰 생각나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씨알은 선을 혼자하려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나가 있으면서도 너나가없습니다. 네마음 따로 내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함석헌은 고집스럽게 민중을 씨알이라 부르고 ‘씨알’로 썼다. 놀라운 것은 2008년 세계철학자 대회가 200여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한국에서 열렸는데 그 철학자대회에 제시된 한국철학의 주제가 동양사상으로 ‘씨알철학’이었다. ‘씨알철학’이 세계화 된 것이다. 함석헌은 어떤 이유들로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1962년), 그 퀘이커의 세계연맹에 의해 1978,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되었는가하면, 주변의지인들, 제자들 중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평화선언대회 세계회의의장으로 평화주의자들의 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1989년 2월 4일, 그는 89세의 나이로 그의 일생을 마감한다. 함석헌은 그야말로 불처럼, 풀처럼 살다갔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그러나 오직하나 역사의 명을 살고 간 것이다. 그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대상이 있었다. 민중, 곧 그의 말로 씨알이었다. 씨알의 역사. 씨알이 주인이 되는 역사. 함석헌은 오직 그 한가지 이유를 위해왔고, 살았고 그리고 갔다.

민중, 민주주의는 그의 유일 영원의 종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