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제작소

민족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국제적 감각을 지닌
민족일꾼 및 사회 섬김이를 양성,
성경 및 국내 외 지도자 리더십 연구를 통해
예비 평화리더로 교육합니다.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바로가기
 
제10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6강
 작성자 : 평화한국
Date : 2012-10-30 11:15  |  Hit : 233  
   제10기_평리아_2012_한국성서대학_-_6강_강의안.hwp (83.5K) [7] DATE : 2013-06-04 11:16:56

평화한국 제10기 리더십 아카데미 (2012.10.30 저녁 7:30-9:30)
 





“현대 민족 지도자들에게서 배우는 리더십”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가르치고 정해주는 삶의 스승들이 있습니다. 첫째 스승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둘째 스승은 우리들의 보혜사인 성령이고 셋째 스승은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산 수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성경이 너무너무 중요하지만 성경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알지도 바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성경을 온 몸에 부치고 다니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너무너무 중요하지만 성령의 감화 감동 조명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알지도 바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성령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 조명을 받는 사람들이 부족하고 치우치고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산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또는 상치되는 삶의 모습을 비교하여 바라보면서 배우고 깨닫게 되는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심각한 약점과 문제점의 하나는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제대로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어서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만남과 대화를 힘써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이고, 둘째는 미래와 현재와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이고, 셋째는 하늘과 땅과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 즉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결국 알파와 오메가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온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나 자신을 내 위에서 내려다 보는 ‘초연’의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닐 때 보다 겸허하고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균형 잡힌 삶의 자세를 지니게 되고 그래서 보다 여유롭고 보다 포용적이고 보다 용기 있고 보다 즐거운 삶의 자세를 지니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현대 한국 민족의 지도자들 특히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들이 어떻게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끼치는 영적 리더십을 지니며 발휘했습니까? 저들이 지녔던 영적 리더십은 어떤 종류의 리더십이었습니까? 한국 현대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한국교회와 민족의 지도자 일곱 분의 삶과 사역과 리더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처음 다섯 분의 삶과 사역과 리더십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서 소개하고 나머지 두 분의 삶과 사역과 리더십은 보다 자세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님(1869-1935)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참회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조선교회를 태동시킨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생겼습니까? 저는 길선주 목사님의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로부터 그런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에서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라고 부르짖으면서 처절한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회개와 헌신과 사랑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던 강력한 영적 리더십은 바로 그의 회개와 참회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영적 리더십은 회개와 참회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1865-1942)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함께 고난과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회개의 기도와 함께 제주도 주민들을 향한 고난을 무릅쓴 뜨거운 사랑과 섬김으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평생 새벽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부르짖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홍수로 인해 강물로 떠 내려가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이기풍 목사는 생명을 내 갈고 강물로 뛰어 들어 헤엄을 쳐서 그 여인을 구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뜨거운 기도와 함께 헌신적인 사랑과 섬김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미신과 불신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강력한 영적 리더십은 처절한 회개와 함께 제주도민들을 향한 고난과 사랑과 섬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수 많은 인재를 키우고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3.1 운동의 주역” 이승훈 선생님(1864-193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조만식 장로님과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님과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민족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조만식 선생님과 함께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를 사랑한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였고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기도에 전력한 철저한 기독교 지도자였지만 천도교의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강하게 주장할 만큼 포용성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조만식 선생님과 함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의 관용과 포용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과 학교를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과 학교를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조선 교회와 사회에 나타내 보인 강력한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1902-195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을 통한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는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한국과 일본과 세계에 미치고 있는 감화력은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강력한 감화력과 리더십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습니까? 저는 손양원 목사님이 그의 삶으로 나타내 보인 고난을 통한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능력 있는 목회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극히 싫어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신학교 졸업 후부터 한 평생을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도 아니었고 형식으로 하는 사랑도 아니었고 명에나 상급을 위한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노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우리들 모두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강력하면서도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영적 리더십은 고난을 통한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한국교회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1902-200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사회로부터 그리고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누구보다 광범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끼친 비결은 그가 지녔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한경직 목사님은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둘째 한경직 목사님은 착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셋째 한경직 목사님은 주변지향적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관심과 사랑은 민족과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과 북한과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에 미쳤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천도교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그의 감화력과 지도력을 널리 나타내 보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사회로부터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그리고 타 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누구보다 광범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끼친 비결은 그가 지녔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한국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고 한국교회를 사랑한 봉사자였습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한경직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김화식 목사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사랑과 평화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고당 조만식 장로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조만식 장로님은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스승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임을 우리는 조만식 장로님의 삶에서 발견합니다. 오산 학교의 선생이었고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국민족과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주기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함석헌 목사님과 백인제와 주기용과 김항복과 김홍일 등이 있었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이들 지도자들의 스승이요 지도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이 어떻게 지도자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제 조만식 선생님이 지도자들의 스승과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삶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이 태어나기 20년 전인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던 1882년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조만식은 어릴 때부터 자연히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한 두 살 되었을 때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열한 두 살 되었을 때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한석진 목사 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 자제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는데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양귀자였지요. 이 양귀자가 마포 삼열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 때문에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가 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인쇄한 쪽 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 서류인 인가귀도 덕혜입문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 서류였는데 양지 냄새와 인쇄 묵 냄새들이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냄새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년 전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 한 사람에 의하여 길선주 목사님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기풍 목사님이 회개하게 되었고 한경직 목사님이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고 조만식 장로님이 복음에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전도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게 됩니다. 조만식은 어린 시절 한석진의 아들을 글동무로 삼아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쪽 복음과 전도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상업에 종사하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놀음에 빠졌는데 이 때 한교정이라는 청년이 그에게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보라 권고했습니다. 조만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 저녁에 술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마지막으로 밤이 새도록 이별주를 마시었습니다. “자네들 다 좋은 친구들인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난 예수 믿기로 작정했네. 이제부터 나는 숭실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네. 나라를 살리기 위함일세. 앞으로 자네들, 내 친구가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입에서는 아직 술 냄새가 나고 발걸음을 갈지자로 걷는 몽롱한 꼴을 하고 조만식은 숭실학교를 찾아가 당시 설립자요 교장이던 배위량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습니다. 배위량(Baird) 박사는 조만식의 주정뱅이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부는 무엇 하려 하려나’ 라고 말하면서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라고 꼬부라진 혀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에 배위량 박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으로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만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만식은 1905년 23세 때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숭실에서 '거듭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그는 많은 기쁨을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숭실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러고는 학우들끼리 즐겁고 웃고 놀고 불규칙하나마 운동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친밀이 사귀며 지냈다. 여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너와 나도 없는 참 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이렇게 조만식은 1905-1908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가는 시기에 숭실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만식은 숭실을 졸업하자 1908년 4월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경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이 때 조만식은 인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습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습니다.

조만식은 1913년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오산은 그가 존경하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사재를 털어서 창립한 학교였습니다. 오산은 개교이래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만식 선생은 여기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신앙훈련과 인격훈련을 시켰습니다. 오산에서 조만식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김기석과 김홍일은 이렇게 스승을 회상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같이 하고 학생들 틈에 끼어 구보도 같이 하였다. 그 때 오산학교는 사환이 없고 청소를 위시하여 난로 피우기 장작패기 같은 일은 선생과 학생들이 맡아서 하였다 고당은 여러 번 학생들을 데리고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베어 같이 날라왔다. 겨울에 눈 오는 날 아침이면 고당은 맨 먼저 교정에 나와 선생과 학생들이 다닐 길을 내고 운동장 눈을 쓸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을 지도하고 같이 장작을 패고 눈을 쓴 것뿐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 넘어 오산은 놀랍게 변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는 검소한 기풍이 번져나가고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이 불타 올랐다"

조만식 선생님은 오산에 부임한지 2년 후에 교장의 자리를 맡아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는 교장이면서 사감이면서 사환과 교목까지를 겸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인제가 독일로 유학을 가고 주기용과 김항복이 교육에 헌신하기로 하고 김홍일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고 홍종인이 신문기자가 되고 이호와 임극제가 이과계통에 진학하고 한 것이 고당의 영향 아님이 없었다. 이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어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부어넣어 주었다. 고당은 오산에 있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 받는 동지들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을 미안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고당 선생께서는 그 때 오산중학에서 수신(도의)에 해당하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또 특별예배도 주도하셨는데, 하루 아침엔 수신시간에 들어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인자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눈물은 동정과 사랑을 의미하고 땀은 땀 흘려 일함을 의미하며 피는 희생을 의미하는데, 이 세가지는 우리가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땀 흘려 일을 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라를 살리려면 사람들이 변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변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에게서 배운 한경직 목사님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요즘 와서 제가 오산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 생각해 보거든요.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이 늘 세 가지를 강조한 것이 생각납니다. 첫째는 애국 사상을 고취했습니다. 둘째는 현대과학을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셋째는 아무리 애국심이 있고 과학적 지식이 있다 해도 사람이 바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이 바로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나와서 양복도 다 벗어버리고 한복 입고 ‘난 한국 사람으로 살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양 사람은 좀 웃을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소금으로 양치를 하지 치약으로 양치하는 법이 없었고 비누 세수하는 법이 없었어요. 그분은 ‘한국사람이 살려면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하며 ‘조선물산 장려회’를 조직하고 남의 물건 쓰지 말고 자급자족하자는 운동을 일으켰지요.” 조만식 장로님은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지도자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둘째, 조만식 장로님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조만식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도 나라를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청년 조만식이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는 망나니들도 많이 있지 않갔소. 그런 술꾼들하고 섞여 놀다 보니 술 먹고 도박하고 싸움하고… 본래 그런 분이라고요. 그러다가 한 20이나 되었을 때 한정교라는 평양 장댓재교회에 나가는 청년이 조만식 선생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지금 너 우리 나라가 어드렇게 되어가는 줄 아니? 지금 우리 나라가 점점 형평 없이 되어간다. 사방에 강한 나라들이 우리 나라를 엿보고 일본은 지금 우리 나라를 꼭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온갖 장난을 다 한다. 그런데 너 같이 한문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도 좋고 재산도 그만하면 살아갈 만 한데, 너 같은 사람이 이런 생활을 해 가지고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그 말이 찔렀단 말이야요. 그게 전도지. 깨달았단 말이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먼저 새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럴려면 예수 믿어야 해.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해.’ ‘예수 믿으면 새 사람으로 변하나?’ ‘아 고럼, 예수 믿으며 돼!’ 그 때 한정교 청년한데 그 소리를 듣고서 변했단 말이야요.”

조만식은 예수 믿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양복은 벗어버리고 한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일본 물건 안 쓰고 조선 물건만 썼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예수 사랑만을 가르쳤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7년에 걸친 오산학교생활과 그 후 3.1운동으로 인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가을 평양 YMCA 총무로 11년간 봉직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조선물산 장려운동 즉 국산품 애용운동을 펴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마음 속에나 내세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와 민족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사회와 민족을 살리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낳는다는 신념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듯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는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타협이 없었으며 거짓을 싫어하고 꾸미는 것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평화를 사랑하며 사람들과의 인화와 관용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직과 진실과 검소와 희생과 화평과 관용의 삶이 한경직 목사님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탈하고 온갖 탄압정책을 자행할 때에도 그는 한 번도 ‘왜놈’이니 ‘일본 놈’이니 하는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며 ‘물러가는 일본 인들을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방 후 일제보다도 악랄한 공산 치하에서 반탁투쟁에 앞장서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은 하나님 신앙에서 기인했고 그의 하나님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평화였습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되 그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실천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사랑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셋째, 조만식 장로님은 교회를 사랑한 봉사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받아 교회를 충성스럽게 봉사했습니다. 그가 지녔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굳게 믿는 보수 신앙이었고,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 신앙이었고, 올바른 인격과 삶을 강조하는 신행 일치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계급의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적 신앙이었고 (사유재산의 제한까지 강조) 사랑과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적 신앙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1921년에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다가 1922년에는 장로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로부터 1905년 분립해서 닭골에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그는 장로로서 겸손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배 때는 맨 앞 자리에 앉았고 당회에서는 발언을 별로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것만 말했다고 합니다. 황성수씨는 장로로서의 그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만식과 같은 장로가 있었기에 주기철과 같은 목사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언제나 맨 앞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황보익 목사)께서는 어린 나에게 ‘저 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다’ 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당회에서 별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 있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 선도하였으며 특히 그러한 당회 후원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 목사, 박형룡 박사 송창근 박사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1936년경부터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조만식 장로님은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을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셔와 신사참배반대의 선봉장이 되도록 격려하면서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36년 산정현교회는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을 지목했습니다. 20여 년 전 주목사의 은사였던 조만식 장로를 주목사의 청빙위원으로 삼아 마산 문창교회에 파송해서 일을 성사시켰습니다. 한 때 사제 관계였던 두 사람은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은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을 잘 받들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의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온 교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님을 극진히 받들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인서 장로는 이 점을 이렇게 높이 평가했습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 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 되게 함에는 오부인의 격려와 함께 조 장로와 산정현교회의 힘이 컸었다."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한편 가족들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조만식 장로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옥 중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신앙의 순결과 민족의 정조를 지키는 주 목사님을 격려했을 뿐 아니라 옥 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곁에는 항상 충성스러운 격려자와 협력자인 조만식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옥 중에서, 조만식 장로님은 옥 밖에서, 신사참배 강요와 싸우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신앙을 사수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를 쓴 안도명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소양 주기철 목사가 그 교회의 당회장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 장로와 주 목사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평양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횃불이 될 것이다." 그 목사에 그 장로였고 그 장로에 그 목사였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걸어간 마지막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만열 교수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순민의 길을 걸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 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숭신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활인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 때문에 죽었고 조만식 장로님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과 함께 민족에 대한 충성과 사랑 때문에 죽었습니다. 주기절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의 죽음을 죽었고 조만식 장로님은 1950년 10월 18일 평양 감옥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순교의 죽음과 함께 순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의 순교의 년 월일을 밝히는 문헌은 없지만 조만식 장로님의 손자 되는 정중렬 장로로부터 1950년 10월 18일 평양 감옥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고당 조만식 장로님은 일제 때도 망명할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땅을 떠나지 않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의 협박과 박해를 받을 때도 월남할 기회가 있었지만 북한 땅을 떠나지 않고 순교적 신앙을 지키며 민족과 함께 살다가 순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945년 11월 이승만 박사는 편지를 써서 한양섭이라는 사람을 통해 평양에 있던 조만식 장로님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 월남해서 함께 일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은 그 초청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이곳 민중들을 위해서 나라도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해” 그것이 그의 답이었습니다. 그후 조만식 장로님이 평양호텔에 감금되었을 때에도 그의 제자들이 탈출계획을 세웠으나 그는 여전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이땅 1천만 동포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의 거절의 변이었습니다. 김광수 목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나라와 민족만을 위해서 일하고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그 지조, 그에게는 털끝 만큼의 야심도 명예도 집착도 없었다. 정치적 제스쳐도 화려한 외교할동도 그의 생리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지조 높은 애국자이며 민족의 사표였다.”

조만식 장로님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였고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말로 살지 않았고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진실했고 헌신적이었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과 몸을 순교와 순민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평양 하늘에 아니 한국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귀한 선배들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부끄러운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일곱째로,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무소유와 청빈, 사람 사랑과 주님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니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한국의 언론은 그 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달인 1996년 1월 20일 「군복음화」 신문에 "빛을 남긴 사람"이란 제목의 글을 실어 장기려 박사님을 추모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 분의 삶을 세 가지로 기려보았습니다.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 일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따뜻하게 사신 분, 일평생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 그분이 장기려 박사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 보다는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감동적인 설교 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가들의 말도 믿지 못하고 목사님들의 설교도 신뢰하지 못하는 어둡고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순수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말이나 설교 보다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가난하게 살라고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큰 소리로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육체와 돈으로 추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은 영혼과 영원으로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친히 보여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를 섬기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섬기며 사는 오늘의 시대에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긴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고귀한 삶을 사셨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분의 가슴에 맺혀있던 이산의 슬픔과 분단의 아픔이 그분의 삶을 그렇게도 순수하고 따뜻하고 고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북한에 가서 세상을 떠난 김계용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은 첫째 설교로 주님을 증거했고, 둘째 삶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세째 죽음으로 주님을 증거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그의 가르침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그의 삶으로 주님을 증거했고, 그의 죽음으로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는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장기려 박사님도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나눔과 베풂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평생을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수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습니다. 1975년 정년 퇴임 후 집 한 채 없이 고신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4평 남짓한 남루한 사택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난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상호교환의 원리입니다. 장기려 박사도 스스로 가난해 지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부요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과 삶인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부정부패를 개혁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스스로 검소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주의로 부패한 우리의 사회를 보다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둘째, 사람들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도 사랑하셨고 중풍병자도 사랑하셨고 세리도 사랑하셨고 창기도 사랑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그는 경성의학 전문학교를 지망하면서부터 이런 소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하나님, 의과대학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32년 경성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일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40년 일본 나고야 대학에 제출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평양 연합기독병원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1947년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외과학 교수겸 외과과장으로 성실하게 일하다가 1950년 12월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오늘의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4일 앰블란스를 타고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평양의 종로 거리를 달렸는데 그때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던 아내와 다른 자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남하했는데 그때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남하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그 아픔과 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의 죄 값을 갚으려는 듯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 없는 끝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 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일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과 의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명절 때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나 며느리나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은 1천원 밖에 주지 않았지만 거지에게는 10만원 짜리 수표를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만원 짜리 수표를 소지한 어떤 거지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 부산대 의과대학 교수로, 서울 카토릭대 의과대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수 많은 의학 논문을 발표했고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는 환자들에게는 한 없는 사랑을 한국 의학계에는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므로 그의 사람 사랑과 사회 봉사의 업적이 아시아적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이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그의 삶의 목적은 명예도 행복도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죄인인 한 여인이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격하여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듯이,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건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박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의 복사판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의 삶이 너무도 헌신적이고 투명해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는 신학이론이나 교리나 교회의 제도나 전통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냉랭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은 주기 힘들다 고 생각하며 사랑실천의 삶만이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고신대의 이상규 교수는 장기려 박사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5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습니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90년 6월 80세가 된 노인으로 아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슬픔의 글을 다음과 같이 띄우기도 했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기 않았더라면… 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여보!”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한번은 그의 제자들인 재미 의료인들이 장기려 박사가 중국이나 제 3국에서 사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산 가족이 어디 나 혼자 뿐이냐 나 혼자만 가서 가족을 만나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어떠하겠느냐. 통일이 되면 모두 함께 가서 만나지.” 그의 사랑은 너무나 높고 깊고 넓은 이타적인 민족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리움보다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그가 제2차 남북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확정되었을 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1994년 2월 제2차 남북 고향방문의 교환합의가 무산 되었을 때 그는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고 그 해 10월 심한 뇌졸중으로 쓸어졌는데 결국 그 뇌졸중으로 1년 2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대신 만나기는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척추결핵으로 경성의전부속병원에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주치의가 27살의 젊은 의사 장기려 박사였다고 합니다. 춘원은 장기려 박사의 순수한 인격과 영혼에 매료되어 장기려 박사를 그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인 의사 안빈의 실존모델로 삼았는데 그때 장기려 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요." 그는 돈이나 출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점점 우리들의 사랑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에 장기려 박사님은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미움과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한반도 안에서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의 가족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임을 우리들에게 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병든 우리 사회를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깨어져 가는 우리의 가정을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분단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 오는 길도, 바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애와 삶은 참으로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습니다.

셋째, 주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충성스럽게 사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주님의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삶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사실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월남 후에는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장로로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 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습니다.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은 실로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 이었습니다. 하나님 섬김과 순종의 삶이 퇴색되어 가는 이 시대에 그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고 갔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의 빛을 비추면서 사신 한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릅니다. 순수하고 가난하게 사신 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신 분, 충성스럽게 섬기며 사신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훈훈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분은 작은 예수로 살았습니다. 분단 민족의 슬픔과 아픔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분입니다. 고귀한 분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분과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 광범하고 깊은 영향을 미친 민족과 교회 지도자들의 리더십의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참회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함께 고난과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수 많은 인재를 키우고 “3.1 운동의 주역” 이승훈 선생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을 통한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한국교회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님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무소유와 청빈, 사람 사랑과 주님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귀한 분들이었습니다. 저들의 가슴과 마음에는 분노와 증오가 자리 잡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명예욕도 물론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품고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귀한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은 순수한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리고 민족과 교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 열 분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