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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4강
 작성자 : 평화한국
Date : 2012-10-16 11:06  |  Hit : 216  
   제10기_평리아_2012_한국성서대학_-_3강_강의안.hwp (79.0K) [13] DATE : 2013-06-04 11:07:44

제10기 평화한국 평화리더십아카데미(2012. 10. 16)


제4강 조만식의 생애와 평화통일 리더십

권성아 (통일미래사회연구소 운영위원장)

1. 조만식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위대했을까?

1) 탄생의 신비

(1) 크리스마스 이브에 탄생 : 1883년 2월 1일, 음력으로는 1882년 12월 24일 출생

(2) 반석에서 태어나심 :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안골 마을(內洞)

2) 성장의 특이점

(1) 쌈꾼에 ‘모지랑’ 머리

(2) 어린 나이에 상업에 종사 : 15세

(3) 술 잘 먹고 놀음 잘하던 젊은 난봉꾼

3) 인생의 전환점

(1) 1904년 러일전쟁 시 피난지에서 : 서당 다닐 때부터 친구이자 지물상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22세)

(2) 장대현교회 교인이 됨 :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술과 이로 인해 맺어진 세상친구들과 결별

(3) 1897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평양에 처음 세워진 숭실학교 입학(23세) :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친구의 권유

배(위량, W. A. Baird, 숭실학교 초대교장) 박사는 조 선생의 곤 쓰고 주정뱅이 같은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부는 무엇하려구 하겠나” 하면서 숭실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이었으나, 조 선생은 지금에도 어떻게 그러한 걸작의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하고 대답을 한 것이 배 박사를 감격케 하여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 선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다(?조만식 선생의 청년학도시대?, ????회상록????, 64-65).

2. 조만식 선생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1) 위대한 선배들

(1)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탁월한 연설로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산 안창호 선생 :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임을 깨달음

(2) 숭실학교 초대교장 배위량 박사 : 전도의 목적이 “영혼을 천당으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세기에 민족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배우게 됨

(3) 1907년 정주에 오로지 민족자본에 의하여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

2) 1907년 대부흥회

(1) 1903년 겨울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부흥회의 불길, 1907년 1월 연례사경회를 시작하면서 활활 타오르게 됨

(2) 1907년 4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도 이 불길이 번지기 시작

(3) 당시 중학교 졸업반이던 만식도 이 성령의 불길로 심령이 뜨거워져, 그의 삶은 하나님과 조국을 위하여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기독교적 신앙이 바탕을 이루게 됨

3) 일본으로의 유학과 남다른 신앙생활

(1) 1908년 4월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생활 시작(26세) :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면서, 1909년 5월에 동경 조선인교회(초대 목사 한석진)가 조직되자 그 영수(領袖) 직을 맡았으며, 동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에 추대됨.

(2) 1910년 4월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 입학(28세). 그러나 8월 29일 조선은 일본과 합병됨. 이러한 때 기독교운동을 발전시켜 민족의 독립정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독립된 한인교회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동경 YMCA 안에 한인교회 창립. 그러나 교리와 교파 문제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따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며 “가뜩이나 우리 한민족이 국난을 당하고 있는 이때, 그것도 본바닥 일본에서 이러한 민족분열의 인상을 주게 되다기 가슴 아픈 일”이라고 판단하여 1911년 '재일조선인 장감연합교회'를 설립하고 영수 직책 맡음.

(3) 당시 동경 YMCA는 유학생들의 집결지이면서 민족운동의 심장부가 됨. 여기서 김성수, 안재홍, 신익희, 현상윤, 조소앙 등과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 이는 유학생 600여 명의 인권과 조국의 자주독립 선봉대로서의 결집된 독립투쟁 의지의 모임. 때문에 1919년 3?1운동에 앞서 일본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도 가능했던 것.

(4) 하루는 친목회 총무인 송진우가 ‘호남유학생 다화회’(茶話會)라는 산하 서클을 조직하여 고당을 당혹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우리가 앞으로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가자. 인화단결이야말로 앞날의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독립하였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로 이들을 설득.

3. 조만식 선생의 위대성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1) 겸손한 신앙심

(1) 1906년 1월 이후, 1905년 장대현교회에서 지교회로 설립한 평양 닭골(鷄洞)의 산정현교회에 출석. 1913년 3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 교사를 맡으면서, 1921년 이 교회 집사로도 봉사. 1922년 장로로 피택 되어 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자신은 아직 장로가 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겨 교리문답 시험에 제대로 답하지 않아 낙제. 그러나 평양노회에서는 “그의 인품과 신앙 그리고 사회에 끼쳤던 지도력 등을 고려하여 준무시험(準無試驗)으로” 장로 임직을 줌.

(2) 1930년대 산정현교회의 위치를 고려하여 일제 박해에 대항할 만한 지도력과 역량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주기철 목사가 천거되었는데, 주 목사는 오산학교에서 고당에게 배운 제자로, 당시 마산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음. 제자인 주 목사를 스승인 고 장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모셔 와 지극한 정성으로 섬김.

2) 신사참배 반대와 창씨개명 거부

(1) 1934년 일제가 만주국에 제정(帝政)을 실시하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을 때,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발생. 신사참배는 1920년대 일제가 그들의 신도(神道)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이를 일반인에게까지 확대시켜 나갔는데, 당시 학교 및 사회교육운동을 통하여 민중들의 민족교육을 주도해오던 기독교는 이에 강력하게 항거하여 끝까지 거부. 그리하여 1938년까지 장로교 계통의 사립학교 18개교가 폐교처분을 당하였으며, 1939년도에 구속?처형된 기독교인의 수는 324명에 이름.

(2) 그러나 천주교의 경우는 1936년 교황청에서 신사참배를 애국행사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개신교의 경우 이미 1935년에 안식교와 성결교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였으며, 1938년에는 감리교도 굴종. 그런데 가장 완강하게 거부하였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8일 일경의 감시 하에 이루어진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함.

(3) 이후 일제는 1939년 ‘종교단체법’을 제정하면서 신사참배 강요를 노골화하고, 1940년 기독교 ‘반전공작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신사참배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비(非) 국민으로 단정하고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등 평양 산정현교회 소속 교인들을 비롯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고문하기에 이름.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1942년 3월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명하며, 일본어 성경만 사용하고 모세5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이 있다 하여 삭제하였으며, 찬송가 가운데에서도 같은 이유로 많은 장들이 삭제되는 가운데 1945년 8월 1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발족됨.

(4) 그런데 산정현교회의 경우에는 1938년 2월 주기철 목사가 처음 투옥되었을 때 편하설 선교사가 목회를 대신했는데, 이때 장로들도 한 마음으로 설교를 나누어 감당함. 특히, 고당은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통해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게 했으며, 일제의 형사들이 이중삼중으로 삼엄하게 감시하는 가운데에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산상수훈 등의 말씀을 전함. 그러나 1940년 3월 24일 교회당은 폐쇄되었고, 고당을 비롯한 3명의 장로는 강압에 의해 사표를 내게 됨. 그러면서 일제는 그 비밀장소까지 찾아와 불법집회라는 명목으로 성도들을 옥에 가두곤 했지만, 교인들은 여전히 임시 예배 장소나 구역별로 흩어져 예배를 드리거나 각 가정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지조를 지켜 나갔으며, 여기에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고당을 비롯한 5명의 장로와 4명의 집사가 큰 몫을 함.

(5) 이런 가운데 주기철 목사는, 다섯 차례에 걸쳐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 감옥에서 살다가 안질과 폐병에 심장병까지 악화되어 1944년 4월 21일 하늘나라로 가셔,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됨. 그러나 평양노회는 이미 그의 목사직을 박탈한 상태였으며, 가족마저 사택에서 추방시킨 상황. 따라서 그의 장례식도 교회에서 하지 못하고 평양 서광중학교 앞 도로변에서 치렀으며, 유해는 평양 교외의 돌박산 공동묘지에 안치시킴.

거의 모든 종교인들과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해간 일제의 마지막 때에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정현교회라는 장(場)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된 것임.

4. 고당의 민족과 청년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1) 민족과 청년 사랑을 스스로 실천

(1) 일제강점기 전반기에는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3?1운동 이후에는 대부분의 민족 운동가들이 이 나라를 떠나가지만, 고당은 정치적 망명을 하지 않고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교육과 경제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침. 그리고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 진흥운동과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는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하여 이념이 아닌 민족애로 교육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민족 진흥운동을 펼쳐 나감. 그는 반일운동을 직접 일으키는 것보다는, 민족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그의 민족주의를 펼쳐 나갔으며, 생활로 민족주의를 실천해 나감.

(2) 1935년 ????삼천리???? 10월호에 기고한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는 글을 통해, 청년에게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을 요구. 의식이 없는 청년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 우리나라 청년들이 매우 영리하지만 심히 유약하여 자아의식이 부족하고 세상풍조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살겠다는 굳센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정신”을 가져야 청년의 의미가 있다고 봄. 이렇게 자아의식을 파악한 청년이 생활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절제. 그런데 이는 금주와 금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결함과 과오를 대 청산”하여 일체의 환경의 유혹이나 세태에의 영합을 금하는 것. 그러면서 청년은 누구나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신의 생활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 따라서 작고 낮음에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굳게 잡고 그 일을 통해 이상, 즉 정의와 인도 및 좋은 사상을 실현할 것을 권함.

(3) 그러면서 이러한 권고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청년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에 봉사”할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 청년들의 봉사가 사회에는 조그마한 공헌일지 모르나 그와 같은 봉사는 사회에 ‘신비로운 이로움’(裨益)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성공의 여부는 운명에 맡기고 용기를 잃지 말고 “봉사에 충성”해야. 이는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관련 없이 교육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크고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로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청년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함을 밝힌 것.

2) 기독 청년에 대한 엄격한 사랑

(1) 일반인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는 좀 더 높고 원대한 꿈을 가질 것을 요구. 1935년 8월 27-30일까지 금강산 장안사에서 있었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하는 하령회(夏令會)에서 강연을 맡았던 고당은, “먼저 내 몸과 재산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 바치고 대중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하면서 “천당도 가야 하겠지 만은 이 세상에서 먼저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고 강조.

(2) 더욱이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기독청년들에게는 최상의 꿈을 가질 것을 바라면서, 1937년 ????삼천리???? 1월호에 “기독청년의 이상”이라는 글을 실은 바 있음. 여기서 그는 일제라는 당시의 시대와 환경이 “실로 상당한 이상을 가져야만 될 형편”에 놓여 있다고 보고,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봄.

기독청년들아! 최고의 이상을 가져라!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염원하여라. 그리고 활동할 것이다. 오직 거기에서 의기(意氣)와 위력(偉力)을 얻을 것이다(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회상록????, 422).

(3) 그러면서 그는 기독청년이 해야 할 급선무가 민력(民力)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경제운동’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조합운동?물산운동?절제운동?농촌운동?상공운동 등을 펼칠 것을 주장.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상을 가지고 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 : 33)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모세나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같은 “확고한 신앙으로” 고(高)?원(遠)?대(大)한 이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을 강조.

고(高)란 비루(卑陋)치 아니한 것을 뜻합니다.

원(遠)이란 기간으로는 단기간이 아니며

대(大)란 소리(小利)에 빈약함이 아닙니다(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회상록????, 424).

고당에게 있어서 높은 뜻을 가지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타협 등으로 인하여 비굴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멀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뜻이어야 하며, 작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대의(大義)를 따를 수 있는 것.

(4) 이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야.

첫째 이상적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인격적 소유자라야 할 것입니다.

견고한 의지, 면밀한 두뇌, 성실한 활동 등으로 이상에 입각하게 되면 자연히 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장해를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호사다마 격으로 오인에게는 삼계(三誡)가 필요할 것입니다. 즉, 물욕, 명예, 권세욕 이 세 가지일 것입니다.

셋째로는 동지를 결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인동심’(二人同心) 사업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의 이상을 달성키 위하여 청년동지를 사방으로 구하여 훈련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가옥에는 기초, 지주와 기와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이지(理智) 의지심(意志心) 활동수족(手足) 등 각능(各能)을 결합함이 필요합니다.

넷째로 우리의 사업을 이상에 연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업을 영위하든지 항상 고(高), 원(遠), 대(大)한 이상이 연결하고 이것이 비조(比照)하여 취사(取捨) 재단(裁斷)할 것입니다(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회상록????, 424-425).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격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견고한 의지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면밀한 두뇌가 필요하며 여기에 성실한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봄. 이러한 인격자는 이상적 인물이 되는 데 장해가 될 수밖에 없는 물욕과 명예 및 권세욕을 배척할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것처럼 기독청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지적인 능력과 의지 및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여 한 몸과 같은 동지로 결합하여 행동할 것을 강조.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항상 높고 원대한 이상에 비추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봄.

5.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고당은 어떠한 정치적 리더십을 보였나?

1) 공산주의자들과도 가능한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 한 고당

(1)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한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 이루어지고, 1945년 2월 4일 얄타회담과 7월 26일 포츠담선언이 이루어지면서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 준비 없이 맞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평남도지사 니시까와(西川)가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 고당을 부르려고 16일 자신이 타던 차를 보냄. 이때 심부름 온 김항복(金恒福) 전 숭인상업학교 교장은 고당에게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이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 달라”는 도지사의 지시를 전함. 그러나 고당은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면서 “나는 인수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심부름 온 사람을 곧바로 돌려보냄. 그리고는 다음 날 은거지에 숨어 있다 찾아 온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가 보낸 차를 타고 17일 평양으로 귀환하여, 김병연?한근조 등과 함께 건국방안에 대한 의견과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 자리에 모임. 그리하여 그날로 민족진영 중심의 ‘조선건국평남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고당이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니, 이때 고당은 63세.

(2) 그런데, 건준이 조직된 지 열흘도 못된 8월 25일 소련군(소련 제1극동방면군 제25군, 사령관 N. M. 치스챠코프 대장,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은 평양에 진주하기 시작. 이들과 함께 소련계 한인과 김일성 일파 300여 명도 정치?행정요원으로 따라 옴. 소군정은 8월 27일 “행정권을 민족대표자들에게 이양하여 줄 터이니 15명의 대표가 철도호텔에 오라”고 하여 주저 없이 달려갔더니, 이미 별실에는 15명의 공산당원이 대기하고 있었음. 소련군은 이들 30명으로 ‘정치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민족진영은 공산당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러면 그들의 흉계대로 일이 진행되어 갈 것 같아 이를 수락하기로 함. 더욱이 “저들이 제아무리 소련군을 배경으로 획책하더라도 민족진영 대표인 조만식 선생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들 뜻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임.

(3) 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고당의 숙소를 고려호텔로 정하고, 여기에서 집무를 맡아 보게 함. 그런데 공산당 측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국호는 ‘인민공화국’이어야 할 것이며, 우선 지주의 토지는 무조건 몰수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함. 게다가 당시 평남 개천 출신으로 연희전문과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여 공산당 가운데 가장 지식파로 알려졌던, 그래서 8월 17일 김용범?박정애?장시우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조직한 바 있는, 현준혁 부위원장이 9월 2-3일 경에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짐. 이에 주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진영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는 함께 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으니, 결국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여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민족진영 중심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는 일이 되어버린 셈. 그러면서 정치위는 11월 24일 ‘평남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니, 좌우연립정권으로서의 기능은 그만큼 약화됨.

(4) 당시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동안 백두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항일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다 1937년 국경을 넘어 보천보를 공격하여 국내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에서의 유격투쟁이 어려워져 1941년 소련으로 이동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의 제1교도영 영장으로 있으면서 해방을 맞이함. 그래 1945년 9월 22일 고향인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소련군 사령부에서는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를 열어 성대히 김일성을 맞아줌. 이때 고당이 준비위원장을 맡아 군중들에게 김일성을 소개했으며, 김일성은 이 환영대회를 통하여 35세의 젊은 나이에 ‘민족의 영웅’으로 등장.

(5)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정치위의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좌우연립정권을 꿈꾸던 고당은 1945년 10월에 “대중을 본위로 한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조선민주당’ 선언문을 내고 다음과 같은 강령정책을 내놓음.

1. 국민의 창의에 의하야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기함.

2. 민권을 존중하여 민생을 확보하야 민족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함.

3. 민족문화를 앙양하야 세계문화에 공헌함.

4. 종교, 교육, 노동, 실업, 사회 각계 유지와 결합을 요함.

5.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함.

6. 소련 및 민주주의 제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① 민족의 자주독립과 ②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립 및 ③ 민족의 통일 등의 강령을 정하고 고당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3일 평양에서, 민족 전체의 복리를 증진하고 민족문화를 앙양할 수 있는 대중을 본위로 한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 조민당은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을 생각하여 발기인을 105명으로 하고 3?1운동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중앙위원을 33명으로 하였으며, 좌?우익의 협력을 위하여 부 당수에 민족진영에서 이윤영과 공산진영에서 최용건을 앉힘. 최용건은 김일성이 평양으로 돌아올 때 함께 들어온께 들어원으로, 바로 김일성이 추천한 인물. 좌?우익 연합의 입장을 띤 조민당이 깃발을 올리자 각지에서 엄청난 호응이 잇따라, 창당 수개월 만에 이북 전역에 당원 50만 명을 확보할 정도로 당세가 확장됨.

2) 그러나 신탁통치는 결사코 반대한 고당

(1)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소?영?중 4개국의 최고 5개년에 걸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그 다음 날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북쪽에서는 조민당이 이를 주도함. 고당은 조민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보호조약을 체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탁’이라는 단어는 조선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다가 신탁안이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거부하는 소련의 작품이라 간주하여 “신탁통치는 지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함.

(2) 그러자 소군정에서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소군정은 북조선 5도행정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 찬성을 결의하도록 하는 방침을 세움.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찬탁으로 선회하게 되었으며, 최용건은 고당을 찾아와 신탁통치에 찬성해줄 것을 19번이나 간곡히 요청. 그러나 고당이 이것도 거절하자, 공산진영은 고당을 민족반역자로 날조하고 매도하기 시작. 이에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은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공산진영은 좌파로 민족진영은 우파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고 맘. 그리고 우파인사 대부분은 월남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이때 이윤영 부당수도 월남하여 1946년 1월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창당. 이에 따라 이제 북쪽에는 민족진영이면서 비 공산당 계열로는 유일하게 고당만 남아 있게 되는 처지가 됨.

(3) 이런 가운데 1946년 들어 치스챠코프 장군과 로마넨코 장군 및 V. I. 코브젠코 소령이 새해 축하인사를 하러 고당을 찾아 와서는 또다시 신탁통치 결의안을 지지해줄 것을 강요하면서, “우리말만 잘 들으면 당신을 여기의 스탈린으로 만들어주고 김일성은 국방이나 담당케 하겠다.”고 회유. 그러나 고당은 이 결의안에 서명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반대. 그러자 치스챠코프 장군은 “죽일 놈들! 어쨌든 결국 서명하게 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림.

(4) 그리고는 1월 5일 소군정은 5도행정국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찬성 결의를 독촉하였는데, 이때 행정 수반으로 사회를 맡은 고당은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반탁고당설을 한 후, 회의장에서 퇴장하여 버림. 이로 인해 고당은 친위대가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고려호텔에 연금되고 말며, 이후 일체의 공식적인 정치행위를 할 수 없게 됨.

1. 신탁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모든 의사는 우리 한국인의 자유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탁통치를 찬성만 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리 군정이라 해도 언론이나 의사 표시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2. 무슨 구실을 붙이더라도 신탁통치라는 것은 어떤 나라가 남의 나라 정치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주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후원제 통치라고 변명하지만 그 내용이 신탁통치와 완전히 다르지 않는 이상 결국 마찬가지가 아니냐.

3.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을 진실로 원조하려는 호의라면서 신탁통치는 왜 강요하는가? 카이로선언이나 포츠담선언에서도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은 이런 의미에서 잘못된 국제협정이다.

(5) 이러한 일을 진행하는 동안 소군정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공산기지 건설 노선과 조직에 관한 보고연설을 하여 책임비서로 선출되도록 함. 그리하여 1946년 들어 신탁통치 문제가 결렬되자 소군정과 공산주의자들은 조민당을 접수하고, 2월 5일에는 조민당 ‘열성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조만식 규탄 선언문”을 채택하고 최용건을 당수로 앉힘. 그리고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도록 하여 북쪽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하며, 부위원장에 김두봉 서기장에 강양욱을 앉혀 후에 이 지도부가 북한정부로 발전해 가게 함.

이와 같이 “김일성은 소련군이라는 발전소가 송전을 해야 빛이 나지만, 고당은 스스로 자가발전해서 빛을 발하는 사람”이었던 것.

3) 이렇게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북쪽에 남은 고당

(1) 1944년 4월 주기철 목사가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게 되자, 고당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1945년 4월 고향으로 낙향하여 은거생활에 들어갔었음. 이때 고당은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겼었음.

애국애족을 하다보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만, 내가 죽은 뒤에 너희가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을 쓰지 마라. 그 대신 큰 눈을 두 개 새겨 다오. 그러면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보리라.

(2) 고당은 죽기 전에 일제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됨. 그리고 해방을 맞게 되나,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은 보지 못하며,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와 맞부딪치게 됨.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도 조선민주당 당수로 있을 때도 고당은 항상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는 정권을 창출하려 함. 그러나 신탁통치 문제가 발생을 하면서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당의 교란 공작으로 인하여, 일반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독립된 하나의 민족국가를 설립하고자 하는 진정한 민족주의는 포기하고 맘. 대신 일반 기독교인들은 반공에 입각한 ‘우파 민족주의’를 형성하면서 대부분 월남해 버리고,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입각한 반일?반제의 ‘좌파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북쪽 지역을 장악.

(3) 이때 공산당이 판치는 것을 목격하고 월남한 우파진영들은 남쪽에 내려와서 보니, “남한이 너무도 어지럽고 또 남한에 있는 정치가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 “우리 민족은 우리 사상과 우리의 손으로 독립을 해야지 절름발이 독립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 그래서 “유일한 대안은 고당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남한 정계 지도층과 월남한 사회자들은 몇 사람을 다시 월북하도록 하여 고당을 서울로 모셔오려 함. 그러나 고당은 자신만 살겠다고 자신을 믿고 있는 이북 사람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죽으나 사나 평양을 떠날 수 없다”는 각오를 단호히 말함.

(4) 그 이듬해인 1947년 2월 중순부터는 가족의 면회까지 사절되었는데, 산정현교회에서 함께 장로직을 맡았던 오윤선의 아들 오영진의 회고에 의하면, 고당이 그해 7월 7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미 측 대표로 평양에 체류 중인 브라운 소장을 면담하고 고려호텔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함. 그리고 다음 날인 8일 고당은 연금 상태에서 구속 상태로 바뀌었는데, 당시 호텔 2층 발코니에 서 있는 모습을 길 건너편에서 그 부인이 마지막으로 접했다고 함.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이북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11월 27일 부인 등 가족도 월남함.

4) 홀로 외로이 북한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당

(1) 이후의 고당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음. 그런데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쪽에서 공산주의 지하공작 책임자로 암약하다 붙잡힌 남로당 중앙위원인 김삼룡?이주하와 조만식을 6월 26일에 교환하여 석방하자고 남한에 제안을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거절. 왜 거절했는지는 모르나, 그리고 승낙을 했다 하더라도 북쪽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던 고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었지만, 바로 그 전날 6?25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교환 문제는 어쨌든 수포로 돌아가게 됨.

(2) 당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아서 하다 1950년대 후반 외무성 제1부장(차관급)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에 의하면, 고당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이 중국으로 일시 후퇴할 때 김일성의 명령으로 처단 당하였다 함. 그들은 후퇴하면서 감옥소에 있는 정치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을 했고, 당시 평양 형무소 소장이던 주광무가 이 문제를 문의하자 김일성은 고당을 포함한 정치범들을 처단하라고 명령을 했다는 것. 이때 조선노동당 상임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허가이와 기석복이 배석했는데, 기석복이 후에 박길룡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함.

(3) 정확히는 유엔군의 평양 입성 하루 전인 10월 15일 대동강변에 있는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가 지휘하는 내무서원들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동아일보???? 1962년 4월 6일자에 전해졌는데, 이때에 고당은 68세. ????동아일보????에 의하면 당시 고당은 극심한 심적 고통과 심장쇠약에 복막염이 겹쳐 남평양의학대학 부속병원 특별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정권은 내무성 구락부에 그때까지 감금해 두었던 재북 저명인사와 종교인들을 모두 집결시키고 병상에 누워 있던 고당마저 그곳으로 옮겼다고 함. 그곳에서 그들은 고당을 포함한 이들을 처치한 후 대동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일부 시체는 가매장하고 일부는 그대로 두고 도망쳐 버렸다 함. 그러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초순 평양을 다시 탈환하자 이들의 처형 장소를 찾아내고는 고당과 그 밖의 정치범을 사살한 것은 이승만과 미군이라고 소문을 퍼뜨림. 즉, “전쟁을 도발한 이승만 괴뢰군이 평양에 쳐들어오면서 조만식 선생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급 인사들을 죽인 후 구덩이에 파묻고 퇴각했다”고 선전했다는 것.

고당의 부인 전선애 여사는 남편의 회상록을 쓰면서 “고당 선생님이 이 나라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기도하시는 힘은, 그분이 살아계셔서 땅에서 수고하시는 것보다 더 큰 힘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음.

6. 고당의 삶이 남한의 기독교인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1) 일본 유학시절에도 “우리가 앞으로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가자. 인화단결이야말로 앞날의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독립하였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하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 고당을 보면서 그의 제자 박재창은 오스카 아메린저(Oscar Ameringer)가 말한 “정치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서로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부자로부터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로부터는 표를 걷어 들이는 예술이다.”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고당은 이러한 술수를 쓰는 ‘정치꾼’(politician)이 아니라 오로지 애국애족만을 생각한 진정한 ‘정치가’(statesman)였다고 평가함.

(2) 때문에 고당은 신탁통치 문제로 당시 북쪽에서 김일성 다음 가는 세력가였던 최용건이 19번이나 설득하러 왔을 때도, “그저 공산당들이 붙어 공격하고 달래고 설명하고 공갈하고 하면 가만 앉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대로 다 한 다음에는 자기는 가만히 “아니!”해버린다는 것이다.”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은 줄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당시는 전부가 그 반대인 줄 고당도 알았는데, 그리고 아니라고 하면 칼이 목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그런데도 고당은 혼자서 아니라고 했다는 것. 함석헌은 그래서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 있나?”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당원들은 그를 죽이자 할 수는 없었다고 봄. 그러나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 하긴 더 어려웠다는 것.

(3) 그래서 김성식은 고당이 남한과 같은 난세에 처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을 것이라 본 바, 고당은 “21세기 이 민족의 앞날을 새롭게 할 하나님의 사람이며 2000년의 한국정치는 물론 인류정치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인간적 민주주의(Humancracy : 益民主義)의 정치적 이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봄.

① 그에게는 물욕(物慾)이 없었으니 협잡배와 같이 어울리지는 않았을 것이요

② 그는 명예에 노예가 아니었으니 권력을 잡으려고 온갖 부정 수단을 다 사용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요

③ 그의 인도주의와 민족애는 비민주주의적 독재정치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4) 고당은 이러한 일을 우리나라에 제한하지 않고 국제적 평등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확장하고자 했으며, 모든 산업을 민중화하면서도 이 모든 일을 법에 근거하여 정당정치를 통하여 실천하고자 함. 이런 고당이기 때문에 그를 “신앙심과 애국심”의 화신으로 평가한 한경직 목사도, 고당이 통일에 있어서도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이라고 봄.

고당 선생의 이야기를 이렇게 마치고 말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고당은 북한에 떨어진 한 일의 밀알입니다. 북한 땅에 떨어진 고당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 동지들의 밀알들은 반드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남북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고당의 날 기념식을 서울에서 할 것이 아니고, 평양 만수대 위에서 성대히 거행할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5) “워낙 뚜렷하고 빛있는 일은 세소인원(世疏人遠)하여 일시 잠적되는 일은 있을지언정 결코 영멸(永滅)하는 법은 없는지라.” 거의 혼자 남아 있는 고당을 구출하러 갔던 나병덕도 “이후 통일이 되면 선생님이 하시던 일이 온 나라에 알려져 북한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실 것이고 또 통일의 후유증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되시라 믿는다고 봄.

※ 읽을거리

1. 고당기념사업회(편), ????고당 조만식 회상록????, 조광출판인쇄주식회사, 1995.

2. 송삼용, ????고당 조만식 - 하나님이 보낸 사람 민족지도자????, 생명의말씀사, 2006.

3. 장규식, ????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 조만식의 민족운동????, 역사공간, 2007.

4. 권성아, ?고당 조만식의 민족주의 연구?, 유병용 외, ????근현대 민족주의 정치사상????, 경인문화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