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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3강
 작성자 : 평화한국
Date : 2012-10-09 11:04  |  Hit : 184  
   제10기_평리아_2012_한국성서대학_-_3강_강의안.hwp (79.0K) [0] DATE : 2013-06-04 11:06:04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 연구

정 영순(한국학중앙연구원)

Ⅰ. 머리말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 형성과정은 일제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구체화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주의 연구는 일제시대를 대상으로 할 수 밖에 없고, 단재 신채호는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면서, 대표적인 민족주의 이론가로서 근대 민족주의자로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안재홍은 『조선사학의 선구자』에서 “그는 구한말의 지도자로서 또는 그의 지속적 노력자로서 종시(終始)한 관(觀)이 있고, 그 사상?학식에 관하여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주의 시대의 말기적인 도정에서 자본적인 민족사상 또는 국민주의의 발흥하는 시대에 걸쳐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으로서 그 개척자적 임무를 다하던 분인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최근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온 천년을 되돌아보기위해서 집필되었다고 하는 『한국사 천년을 만든 100인』에서 ‘민족국가 형성 및 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기준으로 전문가가 선정한 위대한 인물 순위에서 신채호가 6위인 것은 여러모로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단재 신채호의 근대 한국민족주의 형성에서의 위치나 그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학문적인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왔다. 그에 대한 연구는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적 인식이 곧 한국민족주의 사상사의 한 시대적 특징을 이루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들을 재정리하면서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즉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당시 외국, 특히 서양의 문물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시대에서 비롯되어 제국주의 힘의 정치가 침투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 관계에 있었던 한국사회의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첫 시기는 단재가 해외로 망명하기 이전의 계몽적인 민족주의의 시기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일본에 의해 한국이 식민지화됨에 따라 해외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투쟁적, 저항적 민족주의의 시기를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단재의 민족주의 사상이 당시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의하여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던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단재의 민족주의사상 성격이 시기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다 면밀히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Ⅱ. 생애 및 활동

1. 출생과 성장

단재 신채호는 애국계몽운동가, 언론인, 민족사학자, 전투적 민족운동가이며 민중적 민족주의자로 불릴 만큼 모든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치열하게 자신을 불사르면서 일제식민지시대를 살다가 조국의 제단에 백골까지 헌납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스스로 두 나라에서 벼슬을 살지 않겠다는 뜻에서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일편단심가(一片丹心歌)를 본따 처음에는 호를 일편단생(一片丹生)이라고 지었으나 나중에 너무 길다하여 단생(丹生) 또는 단재(丹齋)라고 일컬었다.

신채호는 자본주의 열강의 한반도에 대한 침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민족적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던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한 농촌 선비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채호는 고령 신씨로서 시조 신성용의 26대손이자 신숙주의 18대손에 해당되며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단재 신채호와 신규식, 신석구, 신백우 등 애국지사들을 신채호가 태어난 지역의 고령 신씨 가문에서 배출할 만큼 고령 신씨 종문은 학문과 애국심이 깊은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채호 집안은 사회신분상 양반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빈한하였다. 특히 할아버지 때부터 점차 가세가 기울어져 갔다. 신채호가 태어날 무렵에 할아버지는 처가인 충남 대덕군 산내면 한밭 근교인 안동 권씨 촌 외딴 묘막에 은거하면서 가난한 가계를 이어왔다. 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지고 그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가족이 먹는 음식은 보릿가루에 쑥을 넣어서 쑨 쑥죽이 일상이었다. 끼니를 쑥죽으로 연명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콩죽을 먹으면서 살았다. 어린 날의 쑥죽이나 콩죽은 마침내 신채호를 불굴의 민족혁명가로 만들었다. 그의 생존은 그 혼자만의 생존이 아니었고 한국 역사전체의 생존이었다. 특히 육체의 생존이 아닌 정신의 생존이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 전체, 민족 전체를 살리려 하였고, 영구히 없어지지 않는 정신의 삶을 생활화해 나아가도록 하였다. “나는 아이 때부터 콩죽에 하도 물려서 50이 가까운 지금에도 콩죽이라면 몸서리를 칠 만큼 신물이 나오”라고 망명 시절 친구 원세훈에게 단재는 실토하였다고 한다. 가난의 쓰라림과 병고의 고달픔, 곧 인간의 원색적인 고통을 하늘이 준 오직 하나뿐인 선물로 삼아 무서운 극복의 몸부림을 단재는 일생토록 멈출 줄 몰랐다. 헐벗고 가난하나 구차한 노예의 삶을 뿌리쳐야 했고, 시대의 아픔과 육신의 고통까지 쉬지 않고 겪으면서도 의연하고 씩씩한 횃불 구실을 다하려 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 신광식의 대에는 가세가 매우 어려웠으며 그의 아버지는 신채호가 8세일 때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였다. 그 후 신채호는 할아버지를 따라 청원군 안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가 서당 훈장을 하였던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를 스승으로 하여 한문과 유학 경전들을 공부하였다. 신채호의 할아버지는 양반의식이 강하고, 성격도 매우 강직하여 손자에게 6세 때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한 번 가르쳐서 곧 알지 못하고 암송하지 못하면 심하게 체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봉건적 교육 밑에서 신채호는 당시 유학의 조기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서 9세에 『자치통감(資治痛鑑)』을 마치고 13세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신채호는 두뇌가 영민하고 재주가 탁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모가 잘생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신채호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탁월하고 무엇이든지 한 번 읽으면 빨리 기억하여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신채호의 할아버지가 학자였기 때문에 집안에는 서적들이 상당히 있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던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책을 모두 읽었다.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18세(1897년) 때 대한제국의 가부대신을 지낸 구한말의 대학자이며 수구파인 신기선을 만나 많은 장서를 빌려 읽었으며, 이듬해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는 주로 성균관에서 기거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학한 다른 유생들과 함께 깊고도 폭 넒은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전 유생 중에서 매우 뛰어나 스승과 학우 간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 점차 그의 명성은 당시 기재(奇才)로 서울 장안에 널리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유학에만 침잠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통적, 보수적인 구학문의 한계성을 깊이 인식하고 널리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저술과 시무(時務)에 관한 책과 조선사(朝鮮史)?만국사(萬國史)를 구해 읽는 등 근대적인 신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의욕이 왕성하였다. 열강의 각축으로 날로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민족문화를 계발하고 개화자강사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이다. 그는 주자학이 봉건적인 왕조체제를 수호하려는 양반관료의 학문이고, 사대주의를 조장하는 학문이며, 당시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신제도를 등한시하는 학문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당시 대립되었던 급진적인 개화사상이나 보수적인 위정척사론의 두 극단적인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개화사상을 자주적인 입장에서 민족자강사상으로 수용?발전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 개화자강파로의 전환과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신채호는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 박사의 벼슬을 얻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험난한 구국운동의 길로 나섰다. 당시 우리 정부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정치개혁을 1894년에 단행하여 종래의 봉건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근대적인 민주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꺼려하던 명성황후가 이듬해에 일제의 자객들에게 살해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여 1년 동안 머물면서 우리의 철도부설권(鐵道敷設權), 광산개발권(鑛山開發權), 삼림채벌권(森林採伐權) 등을 모두 외국인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망국적인 처사를 보고 서재필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1896년 4월부터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구국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국 속에서 그는 이미 새로운 눈을 떠 그가 벼슬할 시대환경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국권이 상실되는 시기에 구습을 타파하고 학문의 무용(無用)을 주장하고 조선사의 비판적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반성과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생애를 걷기 시작하였다.

신채호가 서울에 올라오던 해인 1898년(19세)은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해였고, 당시 서울에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근대적 신문들이 발행되어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지원하면서 세계정세의 변화와 국내개혁의 필요를 보도 계몽하고 있었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상경했지만 그가 서울에서 보고 체험한 것은 개화자강의 분위기였다. 예민한 관찰력을 가졌던 신채호는 곧 개화자강의 새로운 사상에 젖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을 계기로 전통적 유교 학인(學人)에서 개화독립사상가로 전신하게 된 신채호는 계몽논설, 사론(史論), 전기작품 등을 집필하면서부터 언론인, 전기작가, 애국계몽사상가, 국사학자로서 한말사상계에 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에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는 시대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를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국권수호운동으로 정치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의병운동과 함께 대두되었다. 이 운동의 시발은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조직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독립협회운동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추진한 초기 개화운동의 계승자로서 한층 시대적, 사회적, 사상적, 문화적 의식과 내용을 심화시키고 관료적 차원에서 민중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발전시킨 정치적인 국권운동이었다. 처음 독립협회는 정부의 개혁파 고급 관료세력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을 세우는데 주력하였다. 1897년 8월부터 독립협회는 매주 일요일마다 토론회를 개최하고 일부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민중계몽에 주력한 결과 점차 그 조직에 민중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며, 또한 그 조직도 민주적 원칙에 따라 운영하게 되었다. 1898년 2월 이후부터 독립협회는 구국선언 상소를 계기로 본격적인 민중주도의 조직으로 정비되어,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고 외세의 이권 반대, 수구파 정권의 부패, 무능을 공격 비판하는 등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한 자주민권자강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당시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이완용 등 일부 관료세력들은 그 운동 방향에 반대하고, 독립협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독립협회는 학생, 상인, 일반시민, 하급관료, 노동자 등의 광범한 민중 계층과 그들을 대변하는 선각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그 조직과 운동방향을 주도하게 되었다.

신채호가 독립협회에 참여한 시기는 대략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자강개혁내각의 수립과 의회 개설운동을 추진하던 전후의 시기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남보다 유난히 시대의식에 민감하고 애국심이 투철했던 신채호는 당시 『독립신문』, 『황성신문』등 저널리즘과 집회를 통하여 구국자강사상을 고취하던 이 독립협회운동을 보고 전통적인 유학사상에서 탈피하여 개화독립사상으로 과감한 자기혁신과 방향전환을 서둘렀던 것이다. 당시의 회상자료인 『독립협회연혁략(獨立協會沿革略)』에 의하면 신채호는 당시 독립협회 소장파의 한 사람으로서 일반회원의 부서담당 중 내무부 문서부 서기장 및 과장, 부장급에서 활약한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가 참여하여 활동할 무렵의 독립협회는 공식 조직보다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자발적 집회가 활기를 띠고 치열한 민중투쟁을 전개하던 무렵이었으며, 이 시기의 집회는 독립협회의 간부가 아닌 일반 회원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거의 날마다 개최되는 형편이었다.

독립협회운동을 계기로 점차 민중의 요구와 의식을 반영하면서 이후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추진된 반봉건?반침략의 민중적 민족운동의 성격을 드러내게 되었다. 신채호 역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의 사고, 학문, 의식, 행동에서 뚜렷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그는 전통적인 구학문인 한학에만 침잠하지 않고 개화자강사상을 과감히 수용하여 민족과 시대의식에 투철한 선진적인 자세를 견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입장은 당시 사회적 현실의 요구와 시대적 자각 아래 이루어진 결과이더라도 신채호와 같은 과감하고 선각적인 지식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친러수구파 정부가 1898년 11월 5일 기습적으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키자 서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연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지도자 석방과 독립협회 복설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신채호는 만인의 요청에 의해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이 만민공동회의 참가와 활동을 전환점으로 하여 주자학도에서 개화자강파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만민공동회운동은 가장 적극적인 자유민권운동이면서 개화자강파의 민중운동이었기 때문에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개화자강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과 친러수구파 정부의 무력탄압에 의하여 1889년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430여명이 체포될 때 신채호도 일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4년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기습 격침한 뒤 러?일 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에 불법 상륙하여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나라의 국권이 가랑잎 같은 처지가 되었다.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가 되 직후인 1905년 장지연의 초청을 받고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들어갔다. 신채호가 입사할 무렵 『황성신문』에는 박은식과 남궁억 등이 있었다. 안재홍은 당시 신채호의 심경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서문에서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한 자루 붓에 맡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이는’ 논객의 길을 택한다”라고 전했다. 개화자강파로서 유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던 신채호는 1905년부터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장지연, 박은식, 남궁억 등이 이 신문을 주도하였다. 그들 역시 만민공동회를 전환점으로 하여 정통파 주자학에서 개화자강파로 전환한 공통의 학문적,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성신문』에서 신채호가 활동한 것은 1년이 채 안되었다. 일제가 그 해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代哭)이란 사설을 실어 『황성신문』이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신채호는 곧바로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의 요청으로 1906년부터 이 신문 논설기자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 매국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고취하는 열정적 논설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애국심이 넘치는 논설 내용과 웅장하고 박력있는 필치는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켰으며, 국민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애국계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신채호가 1906년~1910년 동안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논설은 매우 많았지만, 이 논설들을 관류하는 사상적 체계와 주장들은 한결같이 애국계몽사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배일적인 논조는 ①을사조약의 체결은 조선 황제의 뜻이 아닌 일제의 일방적인 불법조약임을 폭로하고 또 무효화를 주장하였고, ②통감부 설치의 불법성과 일경(日警)의 난폭한 탄압상을 비난?폭로하였으며, ③일제의 부정?불법적인 경제 침략행위를 낱낱이 폭로?비판하였고, ④친일 매국노와 친일신문을 공격?비판하였으며, ⑤정부의 비정을 비판?공격하여 국민들의 민족적 각성을 고취시켰고, ⑥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애국계몽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에서 활약한 신채호의 애국계몽사상운동은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여 ‘입헌공화주의’에 입각한 문명 조국을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었고, 모든 국민이 실력을 배양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신채호의 애국계몽사상은 민족주의사상의 일환이었다. 그의 초기 애국계몽사상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사상으로서, 사상이 운동과 직결되는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 안재홍은 신채호가 우리나라의 봉건 말기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국민주의의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으로서 그 개척자적 임무”를 다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채호가 “국민사상 개혁의 급선봉”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신채호의 선구적 부르주아 계몽사상은 역사적으로 뜻 깊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하였다. 언론인으로 출발했던 단재의 민족주의운동은 당시 언론에 발표되었던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거걸최도통전」을 통해 잘 나타나있다. 이 글들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를 구하려 나섰던 인물들의 정신과 행적을 알리고 있다. 바로 이들을 통해 청년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려 하였던 것이다.

3.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창립

신채호는 1907년을 전후해서 활발한 문필활동의 전개와 함께 애국계몽사상 역사학자로서 대한제국기 사상계에 커다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07년 10월 12일 신채호가 역술(譯述)한 양계초(梁啓超) 원저의 『이태리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 三傑傳)』이 장지연의 머리말과 교열로 광학서포(廣學書?)에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역술서이기는 하지만 국민에게 애국심과 민족자강을 고취하기 위한 그의 열정과 역사 연구의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 최초의 성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그는 애국자의 본보기로서 마치니, 카부르, 가리발디 등 이탈리아 민족국가 건설에 헌신한 세 영웅의 활동과 업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운 이탈리아 건국의 3걸은 결코 이탈리아 현실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국운을 바로잡고 소생시킬 한민족 중흥의 영웅을 열망한 데에 있다. 그 후에 그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민족 자주적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우리 민족의 세 영웅에 관심을 확대시켰다. 우리 민족사를 빛낸 이 세 영웅들은 모두 침략적인 외세와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민족적 위인들이며, 애국적인 영웅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국난 극복의 민족 영웅, 특히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애국적 장군들에 대한 그의 전기물들은 모두 반사대적인 민족 자주의식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신채호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민족사에 대한 열정과 탐구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신채호의 애국계몽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역사학은 당시 우리 민족의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애국심’을 가장 중시하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 ‘애국주의’를 배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과 부문을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에는 그의 독특한 ‘역사민족주의’가 골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민족주의 사관(史觀)을 정립하고, 기존의 사관과 사서(史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첫째, 국사에서의 존화사관(尊華史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였다. 둘째, 왕조사 중심의 중세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셋째, 한국역사에 대한 일본 역사서들의 한국사 왜곡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넷째, 한국인이 지은 당시 역사교과서들을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였다. 그는 특히 『독사신론』에서 확고한 근대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들을 다수 정립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성립은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비롯된다고 평가되고 있다.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 사론이 발표되자 기존의 봉건적 국사관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통해 국사에서 존화사관(尊華史觀)과 사대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대표로 김부식을 통렬하게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왕조사 중심의 중세사학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왕실의 흥망이나 정통성만을 따졌지 민족의 발전과정이나 민족국가 흥망성쇠의 인과도 밝히지 못하는 역사는 낡고 몰가치하다고 규정하였다. 신채호에 이르러 역사서술의 주제가 왕조 중심에서 ‘민족’ 중심으로 이동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한국역사에 대한 일본 역사서들의 왜곡을 강렬하게 비판하였다.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신공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침공설과 같은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무설(誣說)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한국의 역사책들도 나쁜 역사책의 표본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함으로써 ‘신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부여-고구려 주족론(主族論), 단군-추장시대론, 만주영토설, 임나일본부설 부정, 삼국문화의 일본 유입설,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발해-신라 양국시대론과 그 밖에 다수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여기서 우리나라의 중세사학을 완전히 극복하고 확고한 근대 민족주의사학을 창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새로이 대두되는 일제 초기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그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 것은 문필로서 나라를 망친 사대사상(事大思想)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민족혼을 대중 사이에 불러일으키고자 한 애국심에서 취해진 태도였다. 그러므로 그의 언론활동은 정치론 외에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당면한 민족적?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서 보수적인 주자학(朱子學)과 유림(儒林)에 대하여 과감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 반성과 새로운 개혁을 주장하였다. 즉「유교(儒敎) 확장(擴張)에 대한 론(論)」에서 당시 친일에 기울던 대동학회(大東學會)가 유교확장론을 내세우자 “유교를 확장코자 하면 허위와 진리를 확장하여 허위와 허학(虛學)을 버리고 실학(實學)을 힘쓰며, 소강(小康)을 버리고 대동(大同)을 힘써 유교의 빛을 우주에 비출지어다”하면서 그 친일매국성과 반민족적 허위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다시 말해 일부 유림의 위학적(僞學的)?친일적 유교확장론 대신 실학과 대동사상에 입각하여 유교의 참 진리와 실천적인 애국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한 것이다.

신채호는 우선 일제의 강권과 친일 매국관료들에 의해 불법으로 조인된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이 박탈되자, 교육구국사상의 견지에서 신지식과 신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우리민족이 당면한 위기적 현실과 역사적 과제의 타개를 위해 민중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예로 논설 「대한의 희망」에서 그는 ‘국권 없는 국가’, ‘자유가 없는 인민’이라는 대한제국기의 식민지 전야와 같은 위기의 민족현실을 다음과 같이 절실하게 상기시켰다.

오호(嗚呼), 금일 我大韓에 何가 有 한가, 국가는 有하건마는 國權이 無한 國이며, 인민이 有하건마는 자유가 뮤한 民이며, 화폐는 유하건마는 鑄造權이 無有하며, 법률은 유하건마는 사법권이 무유며, 森林이 유하건마는 我의 有가 아니며, … 철도가 유하건마는 아의 유가 아니니, 然則 교육에 열심하여 미래 인물을 제조할 大敎育家가 유한가 此도 無有며, 연즉 식견이 우얼하여 전국 民智를 계발할 大新聞家가 유한가 此도 無有며, 大哲學家?大文學家도 무유며, 大理想家?大冒險家도 무유라

여기서 신채호는 위기적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민족자강의 입장에서 전국민이 분발하여 ‘대희망’을 가지고 ‘신사업’을 일으켜 ‘신국민’이 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희망, 애국심, 역사를 우리 민족이 자강, 독립할 수 있는 기본요건으로 보았고, 이렇게 투철한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국사연구는 더 한층 고조되었다. 이러한 신채호의 문필을 통한 항일구국운동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어 우리의 중요한 외교권, 경찰권, 재정권이 일제에게 박탈된 후에는 직접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는 안창호 등이 1906년에 미국에서 조직하여 1907년부터 가입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같은 해에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가담하여 금압(禁壓)함으로써 일본부채금(日本負債金) 일천 3백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으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6년 3월 말경에는 국권회복을 위해서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킬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한 대한자강회가 창설되어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고 자강주의적(自强主義的) 입장에서 민족 실력배양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07년 8월 이완용 내각은 보안법에 의거 해산령을 내리자 그 해 11월에 다시 대한협회로 발족되었다. 이 대한협회는 1909년 2월경 전국 각지에 60여개의 지회를 두고, 그 회원 수도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조직체로 성장하였는데, 신채호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언론을 통해 민족자강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그는 1907년 9월 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 회원은 민족의식이 철저한 정수분자로 조직되어 1910년경에는 그 회원이 4백여 명에 이르렀다. 신민회 조직은 철저한 비밀결사로서 엄격한 자격심사에 의하여 회원을 엄선하고, 다만 각 회원의 활동은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것을 표방한 것이 특징이었다. 신채호가 여기에 합류한 것은 인적 계보로 보아 『대한매일신보』의 동지들인 양기탁 등이 모두 참여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1908년 1월부터 상동청년학원 내에서 가정교육과 여성계몽을 위해 순 한글잡지 『가뎡잡지(家庭雜誌)』속간을 서둘러 이를 직접 편집, 발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민회의 취지와 목적은 「大韓新民會 趣旨書」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뇨? … 무릇 아한인(我韓人)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기(基) 진로를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기목적을 세움이니, 차(此) 신민회의 발원(發願)하는 바며 신민회의 회포하는 소이(所以)니, 약언(略言)하면 오직 신정신을 환성(喚醒)하여 신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新國)을 건설할 뿐이다.

이 취지문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애국할 때 독립자유의 ‘신국(新國)’, 즉 시민 주체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신민회가 목표한 신국 건설의 모델은 서구의 근대적인 체제의 자주독립국가였으며, 그 조직 역시 민간 중심이었지만 일제 강점 하에서 국가 체제를 은밀히 갖추어, 뒤에 국망(國亡) 후 민족독립운동 및 상해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에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 이처럼 신채호가 주요 회원으로 가입하여 비공식적 대변인으로서 활동하고 있던 신민회는 1909년 봄에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체포되었던 간부들을 중심으로 안창호, 이갑, 이동휘, 이동녕, 유동열, 신채호, 김희선, 이종호, 이종만(이종호의 아우), 김지간, 정영도 등을 일차로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1910년(31세)에 안창호, 이갑 등의 동지들과 함께 분산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4.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전개

신채호의 생애는 1910년을 기점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혁명투사로서 극적인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국권상실이라는 상황 하에서 국내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점을 느낀 그는 더욱 큰 활동무대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2월 그가 여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신채호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혁명전선에서 그의 피어린 망명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따라서 그가 단순한 언론인 역사학자가 아니라 민족 독립을 위해 행동한 실천인이었음을 그의 후기 활동을 통해서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망명길에 오른 신채호, 이갑, 안창호 등은 1910년 4월에 중국 청도에서 모였다. 청도는 독일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독일식으로 시가지가 건설되고 독일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진 중국 내의 독일 영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청도에 모이게 된 것은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또한 무엇 보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국내를 탈출해 오는 애국지사들이 모두 모이기에 용이한 장소였다. 여기서 이른바 청도회의를 열고 독립군기지 창건의 구체적 실행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약 3천 달러의 자금으로 만주 밀산현(密山縣)에 있는 미국인 경영의 태동실업회사(泰東實業會社) 소유지 30팡자(약 70평방리)를 사서 그 땅을 개간하여 독립군기지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만들고 농업을 경영하면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 장교와 독립군 전사들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군장교 출신인 이갑, 유동열, 김희선 등은 무관학교의 전술교관을 맡기로 하였고, 신채호는 무관학교의 국사와 한문 교사를 담당하기로 했으며, 김지간은 농업경영의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한편 1910년 9월 동포가 가장 많이 있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신채호 등 신민회 간부들은 한국이 완전히 일제 식민지로 합방되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 12월 이상설, 최재형, 이동휘, 이종호 등이 중심이 되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할 때 신채호도 참여하였다. 그는 여기서 『권업신문』의 주필이 되어 논설을 책임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12년에는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하여 만든 광복회는 그 후 일제에 조직이 발각되어 1918년 사실상 붕괴될 때까지 3?1운동 이전까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채호는 여기에서 1911년 12월 이상설, 최재형, 정재관, 이동휘, 이종호 등이 중심이 되어 교민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이종호가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게 되자 그 주필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1912년(33세)에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의 동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서 독립단체인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었고, 그 후 만주의 회인현(懷人縣)과 안동현(安東縣)에 지회를 설치했으며, 회원이 약 2만 명에 달하는 큰 단체가 되었다. 이 광복회는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하여 조직한 것이었다. 광복회의 자금은 대종교 계통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냈으나, 이 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은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곳보다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상해에 있던 신규식이 ‘굶든 먹든 함께 지내자’고 청하여 여비까지 보내주었으므로 그는 상해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게 된 또 다른 동기는 단순한 생활고 이외에도 한인 사회내의 지방적 파벌과 지도자들 간의 반목 대립 등이 격화되어 이에 대한 실망도 크게 작용하였다는 추측도 있다. 신채호를 초청했던 신규식은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교제하면서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참가한 바 있었고 상해 교포사회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다. 1912년 7월 신규식은 ‘동단공제(同丹共濟)한다’는 뜻에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기구를 조직한 바 있었는데 상해에 온 신채호도 이 조직 주요 멤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조직의 중심인물로는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등이었고, 그 회원은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상해에서 그는 박은식, 신규식과 함께 청년운동, 교육운동에 헌신하면서 역사학자로서 그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역사는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사학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선사와 세계사의 인식이 절실함을 강조하면서 종래에 기술된 조선사를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즉 종래 ‘동사(東史)’라는 이름의 우리나라 역사가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국가는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라고 규정하여 그 추동력을 강조하면서 당시 여러 역사교과서가 중국의 역사나 선비족의 역사, 일본의 역사로 착각할 정도로 서술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고대사에서 압록~두만강 남쪽에 무대를 설정하고 있는 한국사 서술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 무렵 신채호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영국 조계의 서북천로(西北川路)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우고, 국외에 있는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상해에서의 단재를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무창(武昌)혁명한 지 3년 되던 해 상해에서 단재를 만났다. 단재가 북만을 거쳐 그리로 왔다던 것, 노자(路資)는 예관(?觀)이 보냈다던 것들이 생각나고 단재가 휴래(携來)한 책롱(冊籠)이 둘이든지, 셋이든지 백지에 베낀 『동사강목』이 꺼내는 대로 연방 나오던 것을 본 것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사론(史論)이 나면 모두 단재에게로 향하였다. 그때 단재는 중국옷을 입었다. 회색 융(絨) 두루마기가 발등을 덮은 대로 고개는 항상 기우둠하던 게였다. 언제나 난핍(亂乏)한 빛이 띄어 누르스레 부은 듯도 하고, 기운은 초췌(憔悴)하고 걸어다닐 때면 늘 복부(腹部)를 부등키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냉통(冷痛)이 때때로 심하다고 이러면서도 조선 역사를 말할 때에는 두 눈이 곁에 있는 사람을 쏘고 담변(談辯)이 칼날 같았다.

신채호는 1914년(35세)에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가 윤세복의 초청으로 상해에서 서간도의 환인현(桓因縣) 홍도천(興道川)으로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지사인 윤세복은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환인현에서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창설하고 교포 자제의 교육 및 대종교(大倧敎)의 포교에 힘쓰는 한편, 각지의 독립운동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은식이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신채호는 이곳 동창학교에서 교포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하는 한편, 만주에 거류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가 교재로 『한국사』를 집필, 발간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의식적으로 역사연구의 고증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가 고조선의 지리경역(地理境域)에 관한 획기적인 새 발견과 새 학설을 제시한 것은 중세사학에 대한 그의 투철한 비판의식과 함께 유적답사를 통해서 문헌고증의 범위를 극복하여 실증을 구하는 탐구정신과 결부된 것이었다. 민족사에 대한 신채호의 투철한 사명감과 탐구열은 마침내 퇴영적(退?的)인 역사의식과 중세적, 존화적, 사대주의적 유교사관을 극복하려 하였고, 주체적인 역사인식과 편사체계(編史體系) 아래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관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강조한 고구려 중심 사관은 봉건적인 왕조시대에 고질화되었던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 곧 중세적 유교사관의 사대주의적 교설(敎說)을 극복, 지양함과 동시에 사실(史實)의 실증, 발굴을 통한 자주적이고도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수립하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 신채호의 독립운동 관계 논설 집필은 주로 중국신문들에 ‘한중항일공동전선’의 결성을 주장하고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무장단투(武將段鬪)’, 즉 ‘무장투쟁’이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주창하였다.

한편 3?1운동 후 온 겨레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립된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자체 내의 내분으로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고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사회주의사상과 그 운동이 크게 대두되어, 식민지적 민족의식과 공감, 합류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므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극심하게 표면화되었고, 또한 민족운동의 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지도자들 간에 의견이 대립되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운동의 방법과 전술의 문제는 이미 1910년 청도회의(靑島會議)때부터 교육, 실업 등 실력배양을 우선하자는 안창호 등의 점진론 (漸進論)내지 준비론(準備論)과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이동휘 등 무력급진론(武力急進論)의 대립을 초래하였고, 개조·통합된 임정 초기부터 그 대립은 치열하게 표면화되었다. 즉 이승만·안창호의 지도노선이 크게 반영된 임정의 외교론과 준비론적인 편향에 대해서 이동휘·신채호·박용만 등을 주축으로 한 무력급진론자나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자들은 독립투쟁 방법과 이념을 둘러싸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점차 갈등과 대립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신채호는 북경에서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한 맨 처음의 모임인 ‘29인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 모인 29인들의 임시정부 발기회의에서는 이 회의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하자는 조소앙의 동의가 채택되어 의정원이 성립되고 임시정부의 조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대통령에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는 신규식, 남형우 등의 지원을 받아 1919년 10월 상해에서 동지들과 주간신문으로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그 주간으로서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신채호의 『신대한(新大韓)』과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1919년 8월에 창간한 『독립신문(獨立新聞)』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그는 마치 반임시정부 계통 독립운동가들의 총아처럼 되었고, 임시정부의 압력 등에 의해 상해에서의 『신대한(新大韓)』발행이 중단되자 1920년 4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하여 그 해 9월에 북경에서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발기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서 임시정부보다 독립군 부대들의 무장군사활동을 훨씬 중요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운동의 긴급한 당면과제는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더욱 효과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라고 보고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하였다. 또한 그는 1921년 1월에 북경에서 김창숙 등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였다. 월간인 이 잡지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순한문으로 간행되었다. 이 잡지 대부분의 논설은 신채호가 집필하였다.

다른 한편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12월 8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대통령의 권위로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잘 안되어 1921년 1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령으로 돌아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최고기관의 재정비가 절실히 요구되자, 1921년 2월 초에 북경에서 박은식, 원세훈, 김창숙, 왕삼덕, 유례군 등 14명은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의 동기는 통일된 강력한 정부의 재조직과 독립운동 최선의 방법에 대한 중지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확정되고 신채호의 노선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승리한 것으로 확실시된 1922년에 신채호는 무력급진노선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김원봉으로부터 그들의 폭탄제조소가 있는 상해로 가서 이를 시찰하고 의열단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의 길림(吉林)에서 창립된 폭력노선의 독립운동단체로서 그 이념은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의 내용을 갖고 있었으나 그 운동의 방법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암살, 파괴, 폭동의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의열단의 극렬한 투쟁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판과 비난이 있었으므로 의열단은 그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이론화하고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일을 신채호가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열단 선언문으로서의 “조선혁명선언”이 한 번 공표되자 의열단원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읽는 모든 독립운동가들과 전 민족 성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독립운동이 낳은 가장 귀중한 문헌의 하나가 되었다. 신채호는 개인적으로 이 선언문의 집필과 의열단의 유자명을 만나면서 점차 무정부주의자로 전환하게 되지만, “조선혁명선언문” 집필 당시에도 여전히 민족주의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국민대표회의는 국외의 독립운동 집회로서는 규모가 가장 큰 모임이었고, 임시정부로서는 수립 이래의 가장 큰 도전이기도 하였다. 이 모임은 사실상 각지 각파의 독립운동자들이 거의 총망라하다시피한 통일전선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던 3월 9일 윤자영 등 20여명이 본회의 시국문제 토의안건이 제안되어, 그 중의 하나인 임시정부 개조안이 3월 13일 본회의에 상정됨으로써 이후 회의는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대립되어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창조론은 현재 있는 정부를 해소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기구를 만들자는 것으로, 북경의 군사통일회 계통의 시베리아에서 온 공산당 대표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한편 개조론은 현재 있는 정부를 실제운동에 적합하게 개조하자는 것으로 주로 안창호 계열과 상해 공산당 대표들이 이를 주장하였다. 이 두 파의 대립으로 회의가 혼돈 상태에 빠지자, 5월 15일 김동삼, 배천택, 이진산, 김형식 등 만주 대표들은 대표회의 분쟁을 이유로 군정서(軍政署)와 한족회(韓族會)의 소환을 받아 물러가게 되었다.

회의가 개막된 제63일째인 5월 15일, 김동삼 등 서간도의 대표들이 물러간 후 창조파의 윤해가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시켰다. 이때 개조안은 부결되고, 창조파의 제의에 따라 국호와 연호가 상정되자, 개조파에서는 5월 16일부터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이에 양측에서는 다시 타개책을 강구하기 위해 막후 접촉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자 창조파에서는 단독으로 회의를 진행하여 국호를 “한(韓)”,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정하였다. 이때 임정 당국에서는 6월 6일 내무부령으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창조파의 인사 39명은 6월 7일 회의를 속개하여 운동방침을 결정하고, 전문 10조의 헌법을 통과시킨 후 입법부인 국민위원회와 행정부인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한국정부>의 주동인물은 김규식, 원세훈, 윤해, 신숙, 이청천 등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그해 8월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갔으나, 소련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대표회의를 결렬시키고 단독으로 새 정부를 만들어 왔다는 점을 핑계로 삼았지만, 대일 외교사 한국독립운동 단체를 불러들인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처음에 신채호는 임정을 적극적 독립투쟁 기구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에서 창조론을 주장했지만, 점차 회의가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두 공산당의 지도권 쟁탈전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으며 민족분열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자유시 참변’때 소련군의 독립군 학살과 소련 정부의 창조파 새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불인정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련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 독립운동을 사대주의적인 것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신채호는 한민족이 당면한 최대의 적인 일제에 대한 실천적인 무력투쟁도 한번 하지 못하고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자체 내의 무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보고 이념적, 행동적인 새로운 전기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노선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개척해 줄 길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설명하고 있다.

한편 신채호는 이상의 인생 노정을 걸으면서 겪은 좌절감으로 인해 승려가 됨으로써 불교에 의탁하여 극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3월 북경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작(詩作)과 사색을 하면서 역사연구의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해 여름에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의 집필을 시작으로 그는 민족사연구의 사명을 새롭게 깨달았다. 국내의 『시대일보』,『동아일보』, 『조선일보』등에 발표된 그의 대부분 역사논문과 저작들은 모두 이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국사연구에만 집중하면서 이회영, 김창숙 등 절친한 동지들과만 접촉하였고, 유자명을 통하여 알게된 이석증 등 중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만나 무정부주의적 견해를 경청하는 정도로 외부와 접촉하였다.

신용하는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 유자명을 통하여 무정부주의를 알기 시작하였고, 이 선언에도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투영되었으나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이 강렬했기 때문에 신채호는 이 시기에도 여전히 민족주의자였다고 평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에 본격적으로 젖어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가을 승려생활을 청산한 후, 이회영, 유자명 등 동지들과 만나고 국사연구를 위해 도서열람의 도움을 구하려고 이석증 등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48세)때 중국의 천진(일설 남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일명 A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신채호는 같은 해에 홍명희, 안재홍의 편지 요청에 의해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본국에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자로서의 활동 시기는 1925년~28년까지 혹은 순국할 때까지인 1925년~36년의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신채호는 1928년 4월에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 개최하여 “선언문”을 썼다. 이 회의에서 신채호 등은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선정기관(잡지 또는 신문)을 설립할 것과 일제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제조소 설치를 결의하였다. 신채호는 이 결의를 실천하기 위한 잡지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외국위체(換) 2백 매를 위조 인쇄하여 고베일본은행에서 2천원을 찾으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대련(大連)으로 호송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중사상범(重思想犯)으로 다루어져 독방에 수감되어 1936년(57세) 2월 21일에 마침내 옥중에서 순국(殉國)하였다.

Ⅲ. 단재 민족주의 사상의 쟁점

신채호는 한말 국망의 위기에 처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일제시기는 물론, 1960년대 현대 한국사학이 일제시기의 민족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시점, 박정희 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체사관이나 국민윤리교육에서도 핵심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풍부하다. 그 중에서 특히 그의 민족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 관점은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첫째,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주체적이며 고유한 민족주의 측면을 강조한 연구이다. 둘째, 앞의 연구 경향이 국가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대두한 연구이다. 즉 신채호의 사상은 초기에 국가주의적 요소가 있었으나 역사담당주체에 대한 인식에서 영웅-국민-민중으로 변모 발전하였으며, 한말에는 국민주권주의, 입헌공화제를 주장했다고 보았다. 셋째, 최근 정치학에서 대두된 연구로서 신채호는 자유주의, 국민주권주의 등의 요소가 있지만 그는 한말 국망 위기에 따라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생존경쟁의 단위로 국가를 상정하여 결국 자유주의를 국가주의에 종속시켜 국가유기체론적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